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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부통령 저격사건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 張勉副統領狙擊事件 ]

시대명 현대
연도 1956년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가 열리던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부통령이 저격당한 사건.

이 사건으로 장면은 왼손에 권총 1발을 맞았을 뿐 암살은 모면했다. 사건 직후 경찰은 범인이 28세의 제대군인 김상붕(金相鵬)이며, 저격동기는 「민주당이 당파싸움만 하는데 실망했고, 특히 장면은 우리의 원수인 과 친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저격동기를 민주당의 내분 탓으로 몰아가려는 경찰 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의혹은 국회 의장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는 그해 실시된 에서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기붕의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사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김상붕의 형 김상봉이 동생의 취직을 알선 해주었던 비밀당원 최훈(崔勳)을 범행의 배후로 지목하고 <경향신문>에 이 사실을 제보함으로써 사건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훈은 장면 부통령의 살해권유를 자유당 정책위원이자 이기붕의 측근이던 임흥순으로부터 받았으며, 그 세부모의는 성동서 사찰주임 이덕신과 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암살모의 공작금은 임흥순과 내무장관 이익흥(李益興)에게서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를 확대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이덕신·최훈·김상붕의 사형 확정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 사건은 국회로도 비화되어 민주당은 이익흥 내무장관의 불신임결의와 <대통령 경고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자유당의 저지로 안건이 부결되거나 의안상정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사건 관계자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최훈·김상붕·이덕신은 이후 장면 정권에 의해 무기로 감형된 반면, 임흥순·이익흥 등 배후조종 혐의자들은 모두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5·16 후 이들 배후조종자 6명도 전원 특사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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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25전쟁과 부산정치파동
6. 원조경제
7. 이승만 독재체제의 구축
8. 4월혁명과 제2공화국
9. 민중운동의 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