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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제3공화국

[ 第三共和國 ]

시대명 현대
연도 1963년 ~ 1972년

1963년 12월 17일 출범, 72년 10월유신> 직전까지 존속한 우리나라의 세번째 공화헌정체제.

통치구조의 특색

△의원내각제 폐지 및 대통령중심제로의 복귀 △긴급 명령권, 긴급재정·경제처분권 등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 부여 △국무회의를 의결기관에서 심의기관으로 전환 △양원제 국회를 단원제로 환원 △헌법개정에 국민투표 필수화.

주요시책

△ 추진 △한일국교정상화 추진 △베트남 파병 △8·15평화통일선언 발표 △남북대화 추진 △경부고속도로 건설 △ 단행 등.

정치·사회상

제3공화국은 5·16 주체세력이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출범시킨 체제로서 의 민족·민주이념에 역행하는 길을 걸었다. 정권은 외세에 의존, 남북간 군사대결 및 체제경쟁을 벌이는 한편, 정권유지를 위해 외자의존적 경제개발을 추진해나갔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을 추진, 65년 8월 위수령발동이라는 강압책으로 반대세력을 억누르면서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비준시켰으며, 베트남 파병을 단행, 우리의 젊은이들을 강대국의 대리전에서 희생시켰다. 막대한 , 수출시장 여건의 조성, 재정·금융·세제상의 특혜, 개발수요의 증가 등 제반 요인이 어우러져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은 성공리에 수행되었고,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박정희정권은 67년의 선거에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60년대 말부터 외채의 급증, 무역적자폭의 확대, 기업의 독과점화와 중소기업의 위축, 인플레 등 예속독점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한편 논리에 입각한 고도성장정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저임금·저곡가청책은 민중의 희생을 강요, 해마다 50만 명 이상의 이 발생했으며, 노동자의 급속한 수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자소득의 비율이 줄어드는 등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69년 9월 공화당 의원만으로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서 안을 변칙통과시켜 71년 가까스로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국제적 질서의 와해·국내 정세의 불안 등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자 남북대화를 추진, 국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71년 12월 선언 등 물리적 강경책에 의존, 집권연장을 꾀했다. 이 시기의 사회운동으로는 4월혁명의 이념을 계승한 한일회담 반대투쟁·부정선거 규탄투쟁·3선개헌 반대투쟁 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으나, 여전히 학생운동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고 60년대 말, 70년대 초로 접어들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 등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이 폭발적인 양상으로 터져나와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예고해주었다.

관련이미지

제5대 대통령 취임(1963.12.17).

제5대 대통령 취임(1963.12.17).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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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1. 5·16과 군사독재의 개막
제3공화국 지금 읽는 중
2. 민족분열과 예속의 심화
3. 경제개발과 민중수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