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순조 4년, 갑자년(甲子年), 1804년
1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1803년 회계장부를 올림.
2월 6일
• 정대용(鄭大容)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9일
• 화성의 유생 우하영(禹夏永)이 책자 《천일록(千一錄)》을 올림.
2월 13일
• 이경일(李敬一)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19일
• 임금이 명릉(明陵)과 홍릉(弘陵)에서 제사를 지냄.
2월 28일
• 대왕대비의 존호를 광헌(光獻)으로 올림.
3월 4일
• 도적 두 명이 비수를 끼고 인화문(仁和門) 밖에 숨어 있다가 한 명은 금군(禁軍)에 잡히고, 한 명은 달아남. 관서(關西)의 비기(秘記)를 사대문에 내거는 일을 모의한 사건과 관련됨.
• 한성 마포와 옹리(甕里) 등의 화재로 민가 326호가 불탐.
3월 16일
• 이서구(李書九)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5일
•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증수가 이루어짐.
5월 15일
• 삼각산 · 목멱산 ·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냄.
5월 22일
• 재차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기우제를 지냄.
5월 25일
• 세 번째로 남단(南壇)과 우사단(雩祀壇)에서 기우제를 지냄.
5월 27일
• 숙선옹주(淑善翁主)의 가례를 시행함.
5월 29일
•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6월 27일
• 한성의 사대문에서 영제(禜祭)를 지냄.
6월 29일
•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한성부의 민가 525호에 휼전을 베풂.
7월 14일
• 윤광보(尹光普)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4일
• 이의필(李義弼)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7일
• 이집두(李集斗)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28일
• 임금이 화성으로 행행(幸行)함.
8월 29일
• 임금이 건릉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함.
12월 6일
• 《대학유의(大學類義)》가 간행됨.
12월 17일
• 화재로 소실되었던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이 중건됨. 앞면 5칸 측면 4칸으로 앞의 계단이 3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각의 현액은 서영보(徐榮輔)가 쓰고, 인정문의 현액은 이해용(李海龍)이 씀.
12월 30일
• 한성부에서 1804년 인구조사의 통계를 올림. 전국의 원호(元戶)는 107만 6,469호이고, 인구는 751만 4,567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