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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 3년, 계묘년(癸卯年), 1723년

조선 경종 3년, 계묘년(癸卯年), 1723년

1월 21일

• 청의 사신 액화납(額和納) · 광복(廣福)이 서울에 들어와서 옹정(雍正) 원년의 삭(朔)을 반포함. 칙사를 서교(西郊)에서 맞고 환궁하여 조칙(詔勅)을 받음.

1월 22일

•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명소(命召)와 통부(通符)를 모두 불태우고 새것을 다시 만들어 옹정(雍正)의 연호를 쓰게 함.

• 청나라의 조서가 있어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사면령(赦免令)을 내림. 또한 백관에게 자급(資級)을 더하게 함.

2월 4일

• 청의 사신이 돌아가니 모화관에서 전송함.

2월 6일

• 증광시(增廣試)의 감시(監試)를 행하여 생원 · 진사 200명을 뽑음.

2월 23일

• 순릉(純陵)에 불이 남.

3월 4일

• 증광전시문과(增廣殿試文科) 41명, 무과 116명을 뽑음.

3월 16일

• 토역정시(討逆庭試)를 행하여 문과 13명, 무과 478명을 뽑음.

4월 15일

• 경기 광주 · 지평 · 양성 · 안산 · 양천 · 교하 · 가평에 큰 바람이 불고 비와 우박이 뒤섞여 내림.

4월 27일

• 청의 사신이 오니 서교(西郊)에서 맞이함.

5월 4일

• 가뭄이 오래 계속되므로 삼각산 · 목멱산 · 한강 등지에 기우제를 지내게 함.

5월 8일

• 청의 사신이 돌아감.

5월 13일

• 재신(宰臣)을 보내 풍운뇌우(風雲雷雨) · 산천(山川) · 우사(雨祠)에 기우제를 지냄.

5월 14일

• 임금이 사직단에 기우제를 지내러 갈 때 보련(步輦)을 타고 양산(凉傘)을 물리침.

5월 18일

• 재신(宰臣)을 보내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함.

5월 19일

•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사단(社壇)의 의식과 같게 함.

5월 26일

• 삼각산 등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지냄.

6월 14일

•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게 함.

7월 6일

• 청의 사신이 한성에 들어옴.

7월 11일

• 청의 사신이 재물을 요구하지 않고 도성을 떠남.

7월 24일

• 나이 많고 병이 든 한성부우윤 이정(李禎)을 체차(遞差)함.

9월 2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5일 동안 관무재(觀武才)를 행함. 이어 10운(韻)의 배율(排律)로 문신을 시험하여 4명을 뽑음.

10월 5일

• 정시(庭試)의 활 쏘는 규칙을 개정하여 ‘유엽전(柳葉箭)으로 기추(騎蒭)해서 두 번 맞히게 하여 2기(技)를 취한다.’라고 함.

10월 7일

• 정시(庭試)를 행하여 문과 5명, 무과 122명을 뽑음.

10월 9일

• 감시(監試)와 회시(會試)를 행하여 생원과 진사 200명을 뽑음.

• 서양국(西洋國)의 문신종(問辰鐘)을 관상감(觀象監)에 내려 새로 만들게 함.

11월 6일

• 청의 사신이 오니 모화관에서 맞이함.

11월 12일

• 청의 사신이 돌아감.

12월 14일

• 조태억(趙泰億)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30일

• 1723년의 총호수는 157만 6,138호로서 한성이 3만 1,859호, 지방이 154만 4,279호이며, 총인구는 684만 6,639명으로 한성 19만 9,018명(남자 9만 396명, 여자 10만 8,622명), 지방 664만 7,621명(남자 321만 5,006명, 여자 343만 2,615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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