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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파동

석유파동

[ 石油波動 ]

시대명 현대

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와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 인상과 원유생산 제한으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야기된 경제적 혼란. 오일 쇼크라고도 하며, 제1차 석유파동은 73·74년에, 제2차 석유파동은 79년에 일어났다.

제1차 석유파동

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이 결정으로 서방세계에 <에너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또다시 인상, 석유에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서방세계의 경제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 서방세계의 중동외교노선이 친이스라엘에서 친아랍으로 기우는 한편, 종래에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을 OPEC가 장악, <자원민족주의>가 강화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

78년 12월 OPEC회의가 배럴당 12.7달러이던 석유값을 단계적으로 14.5% 인상하기로 결정한 것과 동시에 이란이 국내정치 및 경제적 혼란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함으로써 원유가격은 배럴당 20달러선을 돌파하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선진국 경제성장률은 78년의 4.0%에서 79년에는 2.9%로 낮아졌고,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 했으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제국의 경상수지는 78년의 116억 달러 흑자에서 79년에는 322억 달러 적자로 반전되었다.

석유파동과 우리나라 경제

우리나라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제2차 석유파동 때에는 극심한 피해를 입어 79년 경제성장률이 6.5%로 하락한 데 이어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물가상승률은 30%,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 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였으며, 1차파동 이후 1백억 달러를 넘어선 외채는 2차 파동을 계기로 2백억 달러를 상회, 외채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한국경제가 이토록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1차파동 이후 경제의 체질개선을 하지 않은 채 중화학공업화정책으로 경제규모의 확대에만 치중해온 탓으로 풀이된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는 사회·정치적 위기를 격화시켜 와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동의어

오일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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