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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 편혜영의『저녁의 구애』 강 우 성 1. 편혜영을 읽기 위하여 편혜영의 소설을 읽는 데 특별한 정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만『저녁의 구애』 (2011)를 집어 든 독자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인물들에 연민하지 말 것. 소설 너머의 현실을 떠 올리지 말 것. 작가 스스로는『저녁의 구애』 가“세계보다는 그 세계 1 를 살아내는 개인”의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그 개인이 독자들의 공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서 미국에서 문학과 이론을 공부했다. 한동안은 밥벌이를 위해 전공분 감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 연유로 편혜영 소설의 주인공이 개인 야의 학술논문을 주로 썼고, 그 뒤론 이론을 가르치고 이론에 관한 글을 쓰는 일에 몰두했 보다는“장소” 라는 지적도 있다. 이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지만, 2 다. 지금은 한창 영화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며, 선생 일보다는 학자로서, 한 사람의 문화 지 성인으로 올곧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체론과 이론 일반을 다룬 논문들이 조금 있고, 공동작 업의 성과로 펴낸 서너 권의 번역서와 저서가 있다. 부끄럽게도 한국문학에 관한 글은 몇년 만이다. 1 윤고은,「불길한 데깔꼬마니의 아름다움: 편혜영과의 만남」 ,『창작과비평』152호(2011년 여름) 294면.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62 63 아무리 동일한 군상의 변주처럼 그려지더라도 특정한 공간을 차지 지는 않다. 편혜영의 작품세계를 장소에서 개인으로, 알레고리에서 한 독특한 개인의 이야기가 편혜영 소설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은 적 리얼리티의 천착으로, 기이함에서 섬뜩함으로, 나아가 적색 환상세 은 없었다. 연민을 자아내지 못하는 개인들의 개별성이 탈각되고 고 계에서 회색 지옥으로의 변화로 인식하는 일은 물론 가능하지만, 편 유명사로 지칭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혜영의 소설에 걸맞은 독자라면 드러난 것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은 익명적인 세계를 채우기 위한 덧없는 기표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욕망을 읽어낼 더 미묘한 감각을 갖출 필요가 있다. 문제는 나아가 그런 덧없음의 상황 자체를 비극적으로 재현하는 일도 작가 연민을 원치 않는 개인이 여러모로 문제적인 세계를 살아내는 과정 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을 다루는 편혜영 소설만의 독특성을 찾는 일일 터이다. 이는 감상 물론 인물보다 장소가 더 부각되는 것처럼 읽히는 데에는 이유가 성이 대중성과 혼동되고 정치성이 알레고리와 동일시되는 현재의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죽음과 상실감과 섬뜩함의 정서가 지배적인 문학 환경에서 어쩌면 소설의‘정치성’ 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묻는 소설적 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물들의 개별성은 독자들에게 쉽사리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인되기 힘들며 편혜영의 주인공들은 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일상 을 사는‘평범한’존재로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더 확연히 드러내기 때문일 터이다.『저녁의 구애』 의 개인들이 단순히 반복적인 일상의 2. 욕망의 알레고리 세계에 대한 우의(寓意)의 표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그“세계를 살아 내는”강렬한 의지의 화신으로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개 첫 소설집『아오이 가든』 을 읽게 되면, 오비드(Ovid)의『변신』 에 별 인물들이 처한 장소와 상황의 반복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비 나오는 어느 한 대목을 읽는 것 같다가 다음 순간 김기덕의 영화에 극적 처지에 연민하거나 우리가 처한 일상의 닮은꼴을 찾아내는 독 나오는 엽기적 장면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득 브레히 서는 편혜영 소설의 독특성을 낯익은 비평의 문법으로 해소하는 일 트의 서사극이 보여주는 낯설게 하기의 현대적 양상을 목도하고 있 에 가깝다. 개인이나 그가 속한 세계의‘정치적’ 의미를 곧바로 읽어 다는 생각도 들며, 종국에는 카프카의 동물적인 상상력이 몸의 어느 내기가 쉽지 않고, 여기에 편혜영 독서의 일차적 어려움이 있다. 한구석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물거리기도 한다. 작가의 세상에 대한 (2005)에서『저녁의 구애』 에 이르는 편 마찬가지로,『아오이 가든」 증오에 뜨악하기도 하고,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폭력으로 점철된 세 혜영 소설세계의 가지런한 변화상을 추적하는 일도 그리 바람직하 계의 모습에 몸서리치다가도 이런 부패한 세계를 어느덧 아무렇지 않게 즐기고 있는‘나’ 의 태연함에 놀라기도 한다. 하나하나의 단편 2 허윤진,「실종」 ,『창작과비평』152호(2011년 여름) 303면. 크 리 티 카 KRITI K A 들이 가히‘동물적 상상력’ 으로 엮여 빚어내는 거대한 지옥도에 진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64 65 저리를 치면서 이 세계를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해지는 고통 야 한다. 첫째, 많은 비평들이 이미 지적했듯이『아오이 가든』 의엽 스런 순간과 마주한다. 기적이고 비현실적 세계나『재와 빨강』 (2010)의 오염된 도시가 그려 독자를 즉각적으로 반발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한 강력하게 흡인 내는 기이한 풍경은 우리가 경험하는‘현실’ 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 하는『아오이 가든』 의 이중성은 무엇보다도 자타를 가리지 않는‘폭 즉 소설 속의 세계와 일상 간의 차이는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의 지 력’ 의 과잉에서 온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공감능력을 무장해제 당하 극히 비현실적인 면을 환기할 목적으로 도입된다는 사실이 주는 역 여 이 상황에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들이대기가 어려워지며, 즉각 설이 그 하나다.“바로 그 섬뜩한 악몽이 실상 우리 삶의 감추어진 적인 호오의 반응이나 도대체‘왜?’ 라는 질문 외에 달리 취할 수 있 실체”라고 보는 인식은, 비평가나 그 발언에 수긍하는 독자들이 상 는 태도가 마땅치 않아진다. 현실에 대한 철저한 증오와 맞물린 작 정하는‘현실’ 을 동일한 소설적 재현의 대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가의 모성혐오 내지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불편하다. 그런데 동일한 그‘현실’ 이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문제지만,‘현실의 이 도저한 혐오와 허무의 제스처가 그 과도함으로 인해 문득 삶에 비현실성’ 을 환기시키는 알레고리로 읽을수록 소설은‘현실’ 의 충실 대한 지독한 애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일까. 부패하는 시체들의 한 재현과 더 멀어져야 한다는 역설이 생겨난다.‘악몽의 일상화’ 라 세계에서 과연 삶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는 평가는 이런 인식에서 나온다. 3 어쩌면 너무 뻔한, 그야말로‘윤리적’ 물음으로 새길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차원은 알레고리가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앞서와 정반 편혜영의 개인들은 스스로가 처한 그 폭력 과잉의 세계 속에서, 그 (2007)가 그려 대 효과를 지칭할 때 발생한다. 가령『사육장 쪽으로』 악취와 시체들 속에서 어쨌든 그“세계를 살아내고”있기 때문이다. 내는 세계도 알레고리로 분류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우선 이 그런 의미에서『아오이 가든』 은 분명 우리에게 삶의 악취를 환기시 소설집에 묘사된 세상은『아오이 가든』 의 환상지대와 대척점에 있으 키는 강력한 알레고리로 읽히도록 유혹한다. 잘 드러나지 않거나 은 며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전통적 의미에서 현 폐된 것들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비평의 임무를 자인해도 를 실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기율을 따르지도 않는다(여기서「밤의 공사」 『아오이 가든』 에서 사회적 맥락을 직접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떠올려보자). 무엇보다도 소설과 현실의‘차이’ 는 소설을 소설로 구성 것이다. 그렇지만『아오이 가든』 을 특정한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환 하고 소설을 읽게 만드는 구조적 계기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소 상의 세계라 본 뒤 이를 다시 작품 바깥의 추상적 현실에 대한 알레 설을 알레고리라 부르기 위해서는『아오이 가든』 에서와 달리 배후의 고리적 비판으로 읽는 일은 순환논법의 여지가 농후하다. ‘비현실적 현실’ 이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적 의미에 비평들이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편혜영의 소설을 알 레고리적이라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 크 리 티 카 KRITI K A 3 김영찬,「닫힘의 감각, 혹은 우울과 공포」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271면.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66 67 서 알레고리가 재현하는 대상, 즉‘현실’자체의 부재가 관건이 된 인‘현실’ 이 아니라‘현실’ 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쌓 다. 여기서 알레고리는 현실의 부재를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일상 아 올린 퇴행적 환상이다. 성장과 각성을 거부하는 남성들에 대항하 4 의 악몽화”라는 판단이 여기에 근거한다. 여 여성들이 그들을 버리고 달아나거나「소풍」 ( ) 음험한 모임을 훼방 이렇듯 편혜영 소설의‘알레고리적 독법’ 은 상이한 두 가지 차원 놓고「금요일의 ( 안부인사」 )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며「밤의 ( 공 을 혼동해서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특히 현실의 비현실성에 대한 사」 ) 도착적 행태를 무심한 듯 조장하는「첫 ( 번째 기념일」 ) 것은 전혀 비판이라는 소설의 정치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첫 번째 경우와 달리 놀랄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차원의 알레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의 부재 흥미롭게도『사육장 쪽으로』 의 도착성은 섬뜩한 악몽이 벼락같이 를 환기하기에 그 정치적 의미를 논하기가 훨씬 어렵고 미묘하다. 틈입하여 환상이 깨어지는 바로 그 순간`─`예의‘실재’ (the Real)의 왜 그런가.『사육장 쪽으로』 에서는‘현실’ 과 소설이 아니라, 알레고 순간 `─`에도 여전히 존속되며 어떤 면에서는 그 나름의 불온성까지 리적으로 단순화된 일상`─` ‘현실’ 이 아니라`─`과 인물들의 주관적인 획득한다.‘그’ 는 악몽 같은 실재의 순간에‘현실’ 로 회귀하기보다 ‘꿈’ 의 세계가 길항하기 때문이다. 우리가‘리얼한’것으로 알고 있 5 환상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고자 욕망한다. 는 현실은 부재한 채 패턴화된 일상만이 반복되는 순간 악몽이 현실 을 대체하고 일상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악 그는 어느새 트럭을 쫓아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입구까지 왔다. 몽이 현실을 대체하는 순간은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체험되는 섬 톨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불빛 하나 없이 시커먼 어둠에 잠겨 있 뜩한(uncanny) 사건이 아니라 주관적 관념 위에 지어진 주체의 환상 었다. 여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요금정산표를 내밀었다. 거기에 이 해체되는 파괴의 계기이다. 편혜영의 사내들이 집착하는 전원주 는 그의 직장이 있는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불빛이 택과 담쌓기와 카드놀이와 증명사진찍기는 현실을 대체한 악몽을 사라진 도시가 낯설어서, 여기가 도시인지 아니면 그가 사는 마을인지 거슬러서 일상이라는 환상에 필사적으로 머무르려는 물신적(物神的) 헛갈렸다.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가로등처럼 그 반복행위의 표상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육장 쪽으로』 의 진정한 주 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 사육장 쪽으로 가기 위해 속력 인공은 악몽 같은 현실에 저항하는 알레고리적 주체가 아니라‘현 실’ 의 부재를 환상의 세계에 대한 고착으로 상쇄하려는 도착적(倒錯 的) 남성성이다. 그들을 도착으로 이끄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억압적 5 라깡(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이론에서 핵심이 되는‘실재’ 는 견고한 상징의 체계로 이 루어진 현실을 현실로 현상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견고한 상징체계를 작동—실제로는 오작 동—시키는 파열을 드러나게 만드는 그 무엇을 지칭한다. 따라서 상징적 체계에 틈입하는 외 부의 낯선 사물이 아니라 오직 틈새와 파열의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상징체계 자체의 텅 빈 중심을 가리킨다. 실재의 순간은 바로 이 상징계를 관통하는‘환상’ 이 파열을 일으키는 순간 4『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에 실린 신형철의 해설「섬뜩하게 보기」248면. 크 리 티 카 KRITI K A 에 가깝다.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68 69 6 7 을 높였다. 언젠가는 길이 끝날 거였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려가면 어 되는“문명의 내피”혹은“하드고어 원더랜드”너머의 현실이 부재 딘가에 닿을 거였다. 그는 그들이 닿는 곳이 사육장 쪽이면 좋겠다고 생 하는 대신, 곤돌라와 사육장과 동물원과 놀이공원과 전원주택단지 각했다. 「사육장 ( 쪽으로」61면) 같은 일상의 궤도들이 만들어 낸 환상들이 어두운 익명의 도시와 맞 서 있다. 사내들은 그 환상의 공간에서 여자들을 몰아내고 자신들만 개에 물린 아들을 싣고 병원으로 향하는 사내에게 이제‘도시’ 와 ( 공사」 ) 지하벙커를 구축하고「퍼레이 ( 의 더 견고한 담을 쌓거나「밤의 ‘사육장’ 은‘현실’ 의 의미를 잃고 동일한 환상 속의 공간으로 겹쳐지 드」 ) 아파트를 사수하고자 욕망한다「금요일의 ( 안부인사」 ). 일상은 환상 며 이 두 동일화된 공간으로부터 가장 이질적인 삶을 표상했던 전원 을 부추기는 동시에 파괴하지만 이들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 주택단지는 환상의 삼각형의 또 다른 꼭짓점을 완성한다. 그리고 개 을 벗어날 뜻이 없다.“언젠가는 길이 끝날”터이고 그 끝에 다다르 짖는 소리는 이 세 차원의 공간을 관통한다. 이때 과속을 일삼는 트 면“어딘가에 닿을”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럭이나 사육장을 탈출한 개는 정규속도를 준수하고 시간을 엄수하 이 믿음을 악몽 같은 일상에서 다른 무엇과 교환 불가능한‘쾌감’ 의 는 사내의 규격화된 일상을 무너뜨린 악몽 같은‘실재’ 의 귀환을 뜻 근원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편혜영의『사육장 쪽으로』 는 현실의 알 하기보다 동일한 세 지점으로 연결된 환상의 실패를 확증하는 기표 레고리가 아니라 차라리 도착적 욕망의 알레고리다. 일 뿐이다. 환상의 실패가 확인되는 순간 일상을 탈출하는 일이 애 초부터 불가능했음이 드러나지만, 사내들은 깨어진 환상 너머의‘현 실’ 로 회귀하지 않고 실패한 환상을 고수하려는 도착행위를 반복한 3. 차이와 반복 다. 그가 환상 너머에 있으리라 욕망했던‘현실’ 은 처음부터 어디에 도 존재하지 않았던바, 실패한 환상을 고수하려는 사내의 기착점이 사육장 쪽이어야 하는 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저녁의 구애』 (2011)는 이 욕망의 알레고리가 더‘순수한’ 일상에 서 펼치는 미로 체험기다. 사내들의 도착성은 눈에 띄게 희미해졌고 물론 실패한 환상에 머무르려는 사내들의 몸부림이 격자형 공간 여자들은 환상의 파괴자이길 멈추었다. 반면, 일상과 환상은 이제 에서 동일한 일상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에게 남은 유일한 환상의 돌 더 구분이 불가능하게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섞여서 알레고리 파(가로지르기) 행위가 될지 퇴행적인 자학의 제스처로 끝날지 예단 의 흔적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때때로 여러 겹의 쉼표로 이어 하기는 섣부르지만, 적어도 이들의 도착행위가“현실의 비현실성” 을 환기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에게는『재 6 정은귀,「 ‘쥐 되기’ 의 욕망과 정직한 환멸」 ,『크리티카』4호(올 2010) 160면. 와 빨강』 에서처럼 역병과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검역과 통제로 작동 랜드─편혜영 소설과 모더니티의 엽기전」248면. 7『아오이 가든』 (문학과지성사 2005)에 실린 이광호의 해설「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크 리 티 카 KRITI K A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70 71 지는 긴 나열형 문장들이 출현하지만 접속사와 형용사가 결핍된 간 순수한 형태의 환상으로 구축되고 현실에 대한 재현 욕망은 더욱 확 결하고 메마른 문체가 주인공들이 처한 세계의 단조로움을 한층 부 인하기 힘들어진 세계를 그려낸다.『사육장 쪽으로』 와『저녁의 구 각시킨다. 주인공들은 늘 낯선 타지로 파견 중이거나 출장을 떠나거 애』사이에는 환상의 실패가 가로 놓여 있고 두 세계는 서로를 참조 나 여행 중인 채로 한시적인‘실종상태’ 에 처하며, 반대로 정해진 기 한다. 이런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져 반복 간 동안의 유배에서 도시로 귀환하는 참이다. 그리고 정해진 목적지 되는 일상의 묘사가 정당화되지 않을 법하다. 에 도착하거나 출발지로 귀환하기 전에 이야기는 끝이 난다. 표제작 처럼 거대하고 어두운 이 몰(沒)알레고리의 세계는『아오이 가든』 「저녁의 구애」 를 포함하여 알레고리적 일상의 섬뜩함과 기이함은 전 그림자로 채색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불가해한 힘으로 현상하 작들에서와 달리 되풀이되지 않지만, 병적인 세계에서 분열적 자아 며, 여기서 주인공들이 실패한 환상을 고수하는 행위는 주어진 업무 와 씨름하던 인물들은 동일성과 반복이라는 새로운 일상의 세계에 지시를 묵묵히 따르거나 정해진 파견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데 던져져 환상과의 줄다리기를 이어간다. 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일상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더‘순수한’세계가 되었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범상치 않은 숲이 목소리는 불가해하며 인물들 내면의 자기합리화와 방어기제를 통해 ( ) 있고 벌레들이 들끓고 위협적인 동물들이 공존하고 있으며「산책」 작동하며, 이 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우리를 고용한 사람이 누 병리적 자아들과 그 분신들「통조림 ( 공장」 )이 출몰한다.『사육장 쪽으 「정글짐」 ( 군지 모른다는 것” 159면)에 절망하지 않고 알 수 없는“누군 로』 에서 주인공들의 일상을 위협했던 성가신 존재들`─` 「소풍」 의교 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관광버스를 ( 타실래요?」103면) 있어야 한다는 통사고,「사육장 쪽으로」 의 개,「밤의 공사」 의 늪`─`은『저녁의 구애』 사실에 크게 괘념치 않으며 스스로가“일종의 사냥개” 「토끼의 ( 묘」16 에서도 간단없이 지속된다.「산책」 의 멧돼지와 개,「크림색 소파의 면)라는 사실에도 담담하다. 이들의 파견은 억압적이지 않고 자발적 방」 의 노루와 주유소 무리들은 편혜영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환상이 이다. 또는 강요된 자발성을 통해 억압을 증언하지도 않는다. 그렇 깨진 일상조차 안온함을 충분히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위협들이 가득 기 때문에 이들이 처한 이 난처한 상황을 현대인이 처한‘소외’ (疏 찬 세계임을 증언한다. 그러나『저녁의 구애』 는 환상 이후의 더‘순 外)의 증좌라고 읽는 것은 이 소설을 사회적 알레고리로 환원하는 수한’세계를 재현하는 데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이 아닌 모종 데면데면한 읽기에 불과하다. 일상의 반복은 문제적이지 않고 인물 의 추상적 관념의 알레고리를 정제시키지도 않는다. 만일『저녁의 들에겐 억압의 증후가 없다. 그들에게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구애』 가 여전히 알레고리적이라면 이는 현실 환기력 때문이 아니라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것은 어느덧“재미있는”삶으로 표상 작가의 전작들과 맺는 상호텍스트성의 차원에서 그러할 것이다. 즉 된다. 『저녁의 구애』 는 앞선 작품들 이후의 세계, 즉 일상이 더 단순하고 크 리 티 카 KRITI K A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72 73 여기 있으면 하루 종일 벨트 위로 속을 벌린 깡통이 돌아가는 걸 봐야 피한 현실로 인정하는 비극적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들에게는 비 해요. 어지럽죠. 빙빙 돌아요. 귀에서는 날벌레가 윙윙거리며 날아요. 자 극적 태도와 알레고리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꾸 귀를 후벼파게 되지요. 귀에 피딱지가 마를 날이 없어요. 어지럽고 윙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윙거리고 귀가 간지러운데 매번 골똘히 궁리하는 일이라면 못했을 거예 반복” 되기에“낮게 한숨을 내쉬” 기도 하지만 곧“언제나 같아서 다 요. 벨트 앞에 서서 그저 익숙한 각도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 몸 「동일한 ( 점심」83면)이는 일이 매우 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 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거죠. 왠지 뿌듯해요.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자연스럽다. 「통조림 ( 공장」223면) 『저녁의 구애』 의 단편들이 보여주는 이 기이한 편안함은 바로 주 인공들이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순환논리 속에서 느끼는 희한한 형 『사육장 쪽으로』 의 사내들이 관념 속 환상의 실패와 대면케 해준 태의 안도감에서 나온다.「숲」 의 주인공은 미로 같은 숲에서 헤매다 섬뜩한 일상의 출현에 당황하고 불편해했던 것과 달리『저녁의 구 가 죽음을 앞두고 오랜만에 잠을 잘 수 있다고 생각하며,「정글짐」 의 애』 를 지탱하는 인물들은 기계적 현실의 비인간성을 표상하는 징후 주인공 사내는 길 잃은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 자신을 안내해줄 존재 가 되길 거부하면서 통상적인 알레고리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의 출현을 막연하게 기대한다. 사내들이 마주하는 일상은 반복되고 자본주의적 현실의 소외를 표상하는 기표들이 아니며『사육장 쪽으 동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꼭 의미 없는 삶이 되지는 않으며 따라서 로』 에서와 마찬가지로“200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총체적 불확실 일상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모호해진“동일성의 지옥”이 아니다. 8 9 성”을 그 배후에 드리우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복과 동일성은 일상이 섬뜩한 악몽들로 이루어져 있고 알 수 없는 몸이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기계적 삶의 일부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는 쳇바퀴라는 증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분명 알고 있지만 그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는‘사건’ 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너머에“타인과 친밀한 관계가 뿌듯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또한 이 뿌듯함은 반복된 노동이 일시적 「동일한 ( 점심」72면) 따위의 감상은 들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 으로 줄 수 있는 만족감과도 거리가 멀다. 물론 이 대목을 그대로 받 설 자리가 없다. 동일성과 반복은 곧 살아있음의 증좌다.“언제나 같 아들이지 않고 역설적인 자조(自嘲)의 발언으로 볼 여지도 없지는 다는 것” (83면)은 일상의 선물이지 결핍된 욕망의 알레고리가 아니 않다. 그러나 이들이 느끼는 편안함은 차이와 개별성의 상실을 불가 다. 그런데 도대체 왜. 동일성의 반복에서 이들이 느끼는 편안함의 정 8 신형철,「섬뜩하게 보기」246면. 첨언하자면, 신형철의 평가는『사육장 쪽으로』 를 두고 내 린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편혜영 소설에서 어떤‘배후’ 의 현실을 읽으려는 비평의 욕망을 보 여준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크 리 티 카 KRITI K A 9『저녁의 구애』 (문학과지성사 2011)에 실린 김형중의 해설「동일성의 지옥에서」248면.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74 75 체는 정말 기이하지 않은가. 이는『저녁의 구애』 의 인물들이『사육 처럼 무화될 터이다. 차이는 사라지지 않고 항상 회귀하지만, 홀로 장 쪽으로』 의 도착적 남성성을 연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사내들은“이제껏 헤매온 길이었을지도 모를 그곳으로 다시 기이하게도“정식 A세트를 기준으로”정확하게 겹쳐서 동일하게 반 발을” 「정글짐」 ( 176면) 내딛는 것으로 차이를 거부한다. 실종된 인물 복되는 일상이 세상의 모든‘차이’ 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기 때문 들로 인해 차이가 회귀하지만 곧 누군가로 대체되고 이는 최종적으 이기도 하다.『사육장 쪽으로』 의 도착과 강박이 주어진 현실과 다른 로 동일성의 반복으로 기록된다. 격리된 공간을 향한 관념적 환상에의 충족될 수 없는 욕망 때문이었 일탈을 대신하는 기시감이 사내들을 인도하는 곳이 낯선 장소가 다면,『저녁의 구애』 는 그 환상의 실패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세계 아니라‘도시’ 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 도시는“하루에 평균 274명 에서 차이가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역설을 형상화한다. 「동일한 ( 점심」 )으며“구획 정리가 잘된 지 이 태어나고 106명이 죽” 이들에게는 동일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주는 권태보다 차이와 개별 역” 「산책」 ( )이고“단단하고 질서 정연한 서류의 세계” 「크림색 ( 소파의 성이 드러나는 사건이 더 위협적이며 이는 선배와 공장장의 실종 사 방」 )로 모든 차이가 거세된 공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열 명 중 한 ( 공장」 )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건에 대한 거부반응「통조림 명은 길을 잃어 헤매는” 「정글짐」 ( 172면) 위험이 도사린 곳이고 버려 동일성의 반복에서 느끼는 안도감의 상당부분은 자발성을 띠었으나 진 토끼의 묘이자“1인 거주자들” 과 무차별 살해범이 동거하는 장소 실은 무의식적인 차원의 어떤 것이다. 이며「토끼의 ( 묘」 ), 지진의 외상을 안고“불분명한 재난의 위협” 「저녁 ( 그렇지만 이렇게 무의식적인 차원의 안도감이라면 그야말로 억압 의 구애」61면) 속에 살아가는 죽음의 거처이기도 하다. 도시는 익명 적 현실에서 겪는 극심한 소외의 증좌는 아닐까. 흥미롭게도, 차이 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로 같은 동일성의 공간이면서 다른 한 가 사라진 자리를 일종의‘기시감’ 이 대신하면서 안도감의 또 다른 편으로는 출장, 배달, 파견, 심부름, 이주, 여행과 같은 한시적인 실 출처가 드러난다. 차이를 생산하고 개별성을 보존하는 행위가 주는 종을 통해 그들의 차이를 보존하고 있는 이중적 공간이다. 길을 떠 두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을 태세이 「토끼의 ( 난 인물들에게는 용도를 알 수 없는“정보를 수집하는 일” 며 후회할 생각도 없는 것이다.“웃음 끝에 진은 언젠가 이런 일을 묘」 )이나 알 수 없는 무언가를“지정된 장소에 배달” 하거나 아니면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 고“얻어맞은 부위의 통증이 계속되는데 그저“도시를 돌아다니는” 「정글짐」 ( ) 의미 없는 임무가 주어지지만 도 다소 안도감” 을 느끼며“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끝나지 않을 듯 길 그들이 그곳에서 수행하는 일은 관광버스에 오르거나 느닷없는 구 「크림색 ( 소파의 방」 )이라고 위안 게 느껴지는 이 순간도 곧 지나갈 것” 애처럼 스스로의 차이를 새기는 행위이다. 한다. 세계가 동일하게 반복되어 회귀하기에 개별성으로의 일탈을 따라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이 초라한 여행길은 정 꿈꾸는 일은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늘 그래왔듯이 아무것도 아닌 것 해진 임무를 마치고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일 크 리 티 카 KRITI K A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76 77 이 예정된“일종의 순환선” 「관광버스를 ( 타실래요?」 )의 궤적을 오직 명 구애』 의 사내는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스스로를 상품의 영혼으로 표 목적으로만 따라간다. 그들은 예정된 목적지에 당도하는 법이 없다. 상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이다. 그는 때때로“자신을 통제 동일성은 반복되고 순환의 도정에서 벌어지는 여정의‘차이’ 는“튀 하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 「정글짐」 ( )에 사로잡히며“누군가의 숨이 김 닭 대신 국수” 「관광버스를 ( 타실래요?」 )의 차이처럼 무의미하지만 허망하게 끊어졌고 몸이 잘게 바스러져 한낱 얼룩으로 스몄고 누구 여전히 차이를 기록한다. 그 어디에서도“심장이 흔들릴 정도로 허 도 알아채지 못한 남은 빛이 허공을 맴” 「동일한 ( 점심」 )돈다는 사실에 둥거” 리며 어렵사리‘차이’ 를 생산하려는 인물들의 노력은 좌절되고 몸서리치기도 한다. 이렇듯 도시는 세상의 모든 차이가 제거된 공간 “세상은 그가 난생처음으로 복사실에 늦게 나타났다는 사실도 모른 으로 현상하지만 동시에 기시감을 통해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 「동일한 ( 점심」 ) 무심하게 순환하지만 그들에게 세상은 이미 전과 채” 고 거듭 회귀하는 장소이기에 안도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같지 않다.“자신이 배제된 지금의 상황 때문에” 「정글짐」 ( ) 거대한 음 「산책」 ( )이며 매일매일 동일한, 그러나 결코 한 번도 “그야말로 천국” 모를 상상하거나“모든 길을 감추는 숲” 이 아니라“자연보다 더 친 동일하지는 않은 점심을 제공하는‘안락한’ 주거지다. 밀하게 느껴지는 인공” 「산책」 ( )을 갈망하는 일은 도시 속에서 군상이 되길 거부하는 단호한 몸짓에 가까워진다. 이런 맥락에서『저녁의 구애』 의 추방된 도시인은 군중의 무리로 4. 동일자의 즐거운 회귀 숲을 이룬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니는 산보자의 초상과 일견 흡사하 10 다. 숲조차 도시를 이해하는 방편이듯이 그에게서는 도시를 벗어 그러나 이렇게 동일성이 안락하게 반복되는 것은 과연 다행스럽 난 전원에의 향수를 전혀 찾을 수 없고 도시의 찬란한 물질문명을 고 편안한 일인가.『저녁의 구애』 는 전혀 문제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비판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관찰자의 임무도 주어지지 않는다. 도시 이 안온함의 정서를 표면적으로는 저항 없이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는“인공이란 걸 의식할 수 없었으므로 그에게는 자연이나 다름없” 과정을 감상 없이 메마르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문제 「산책」 ( )고 형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가장 익숙 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말을 바꾸면,『저녁의 구애』 는 동일성의 반복 하고도 편안한” 「크림색 ( 소파의 방」 ) 영역이 된다. 그렇지만『저녁의 이 주는 안도감이 실은 동일성의 지옥이라는 환상의 최종적 실패를 나타내는 증후이며 제거 불가능한 차이가 회귀한 결과라고 주장하 10 Walter Benjamin, The Writer of Modern Life: Essays on Charles Baudelaire. Ed.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Harvard UP 2006) 85면.“산보자는 군중 속에 버려진 는 셈이다. 인물들이 스스로를 대타자(大他者)에 의해 미리 설계된 ‘소외’ 의 기표로 자인하는‘문제적이지 않은’행위가 문제적인 것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상품과 동일한 상태에 놓여 있다.”이러한“상품영혼” 의 소유자는“물 결치는 고객들 사이에 흡수된 상품의 환각상태에 굴복한다.” 크 리 티 카 KRITI K A 그 때문이다. 이들의 안도감은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환상을 유지하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78 79 려는 행위의 결과지만 반복적인 일상에서 이 환상이 실제로는 결코 작동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도 한다.“누군 안 그러고 사나?” 라는 물 ‘시대착오’ 에서 나온다. 이 시대착오는 공장장의 죽음이라는‘차이’ 를 삶의 자명성으로 해소하려는 도착적 욕망의 산물이다. 음에 담긴, 차이가 무화된 데칼코마니 같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자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삶의 자명성’ 이라는 환상을 초래한 기계문 발적인’인정은 사실 회귀하는 차이들을 의미화하지 않으려는 도착 명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엇비슷하게‘소외’ 를 겪는 인물들에 연민의 적 의지에 가깝다. 시선을 보내는 낡은 방식의 서사로 회귀하지 않는 데에 편혜영 소설 의 정직함이 있다. 공장장이 싫은 이유는 이미 지나버려 도래하지 모두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공장장의 일과와 식사가 자신들과 다르지 않을 미래를 그가 자신의 현재로 독점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지만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열심히 일했고 고분고분 살았지만, 어쩌면 그래서 직원들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음을 작가는 분명히 인지도 모르지만, 씹고 있는 통조림의 맛처럼 삶이 너무 자명해진 느낌 암시한다. 그런 측면에서『저녁의 구애』 에서 반복되는 동일성은 애 이었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나버린 것 같았다. 지 초부터 대타자에 의해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인물들 스스로의 도착 나버린 미래는 공장장의 현재와 다름없을 거였다. 그것도 믿고 싶지는 적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에 가깝다. 그들이 욕망하는 현실의 동일성 않지만 아주 성공적일 경우에만. 공장장이 싫었지만 딱히 미워할 수 없 은 세계에 대한 주관적 관념과 감각 가능한 객관적 표상체계 간의 는 게 그 때문이었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 공장장이 싫은 것도 그 때 자기동일성(identity) 내지는 자체동일성`─`그 개념적 대립항인 차이 문이었다. 「통조림 ( 공장」212면) 의 무화를 전제해야만 하는`─`이지 모든 차이를 반복해서 회귀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의 동일자(the same)가 아니다. 이 동일자는‘삶 지독한 공장장의 삶이 자신들과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았음에 대 한 직원들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차이’ 는 사라지지 않 의 자명성’ 과 같은 관념에 포괄될 수 없고 대타자라는 표상으로 해소 되지도 않는다. 는다.“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그들은 사라진 공장장이“싫은”것 좀 더 궁리해보자면, 공장장의‘차이’ 가 존재하는 한 이들이‘삶 이다. 그의 실종은 차이가 거세된‘삶의 자명성’ 을 상기시켜 주는 동 의 자명성’ 으로 감지하는 동일성의 반복은 성취되지 못하고 안도감 시에 그 자체로 지울 수 없는‘차이’ 로 기록된다. 그렇지만 그의‘삶 은 획득되지 못한다. 원본(공장장)과 복제본(직원들)의 차이가 사유되 의 자명성’ 에 대한 동료들의 인정은 혐오나 연민같은 정념으로 쉽사 고 표상될 수 있는 한 자기동일성(삶의 자명성)은 한낱 관념에 불과하 리 번역되지 못한다. 모두가 그러고 살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까 다. 그렇다면 이들이 목도하는 현실은 과연 원본 없이 무수한 복제 닭이다.‘삶의 자명성’ 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일하게 반복될 것 품들만이 통조림처럼 동일하게 반복하여 교환되는 이른바 시뮬라크 이며 따라서 미래는 이미 지나버려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르의 세계인가. 재현의 근거가 되는 원본(차이)으로서의 현실이 거세 크 리 티 카 KRITI K A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80 81 된 것으로 현상한다는 점에서 분명『저녁의 구애』 가 그려내는 일상 규칙적으로 먹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늘 똑같은 한 끼의 밥을 먹는 것으 의 풍경은 시뮬라크르로 가득하다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로 그는 어제의 낮과 오늘의 낮이 같음을 실감하고 오늘의 밤과 내일의 문제는 이 특성 없는 인간 군상들이 겪고 있는 이 동일한‘시대착 밤이 다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런 실감과 확신을 통해 자신이 지하 오’ 의 욕망 그 자체가 바로 이들의‘차이’ 를 구성하며 이 차이를 회귀 복사실에 있는 동안 매일 낮과 매일 밤이 각각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이 세계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이를 잊었다. 「동일한 ( 점심」66면 인용자의 강조) 생산하는 이 동일자는 모든‘차이’ 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표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매일 아침 8시 38분에 출발하는 열차와 A세트 정식으로 집약되는 따라서『저녁의 구애』 의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동일한 현실을 복사 복사실 사내의 하루는 오전과 오후가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런 오늘 하고자 하는 욕망은 기실 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성을 구현하는 방 과 내일이, 지난주와 이번 주가, 작년과 올해가, 그리고 미래와 과거 식, 다시 말해“누구나 이기적이므로 누구에게든 이기적이라고 비난 역시 현재와 동일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인용문의 강조된 부분 「저녁의 ( 구애」40면)기 때문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지 못하” 은 사내가 느끼는 동일성이‘객관적’ 현실이 아니라‘주관적’ 실감과 에 철저하게 이기적인 방식으로‘삶의 자명성’ 을 파괴하는 행위가 확신`─`감각 가능한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관념의 동일성에 된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시뮬라크르로서의 일상이 아니라‘동 대한 확신`─`이며 그에 근거한 예측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복사실 일한 차이’ 를 만들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 동일하기에 무한히 교환 사내는 자신의 매일 낮과 매일 밤이“각각 다르게 흘러간다” 는 사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무한히 동일하기에 역설적으로 교환이 불가능 을 분명 알고 있다. 따라서 매일매일의 일상이 주는‘차이’ `─`이‘동 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다. 복제된 일상의 자기동일성과 그 일 일한 차이’ 는 통근열차와 정식세트 같은 사물이 아니라“누구도 알 상을 느끼는 실감의 차이를 망각하고자 하는 그 도착적 욕망의 다른 아채지 못한 남은 빛” 을 느끼는 그의 감각에 차곡차곡 기록된다`─` 이름이 바로 영원히 회귀하는 동일자인 것이다. 를 무의미로 표상하려는 복사실 사내는 욕망이 거세된 소외의 기표 가 아니라 일상이 빚어내는 교환 불가능한 차이의 망각을 욕망하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전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의 같다고 주체이다. 그는 차이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안도감을 유지하기 할 수 있는 밥을 먹으며 그는 자신이 날마다 정시에 복사실 문을 여는 것 위해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망각을 수행하며“무엇을 먹었는지 떠 이 어쩌면 구내식당의 점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커다란 찜통에 찐 「동일한 ( 점심」90면)고 토로 올려보려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찰기 없이 푸석한 밥, 미지근하게 식은, 싱겁거나 짜서 입에 맞지 않는 하는 이 망각의 행위야말로 그를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주체로 만들 국, 비계 많은 제육볶음이나 노랗게 구워진 차가운 생선구이 같은 것을 어준다. 크 리 티 카 KRITI K A 11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82 83 사내들이 느끼는 삶의 동일성은 주체가 마주하는 객관적 일상이 와 유사성으로 촘촘히 짜인 상징계(象徵界)의 그물망을 찢는 섬뜩한 무한히 대체 가능한 사물과 사건들의 연속체라는 사실에서 오지 않 실재의 순간을 상기시켜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통계적 동일 는다. 교환 가능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실은 동일성(identity)이 아 성의 반복이 현실적 비동일성(차이)의 표상으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 니라 유사성(similitude)이다. 동일성의 반복으로 느끼는 일상은 모두 를 독특한‘사건’ 으로 인지하고 반응할 정념을 주체가 감당하길 두 가 서로 함께‘동일한 것’ 을 보고 있다는 환상에 기초한다. 사내들은 려워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저녁의 구애』 는 동일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바로 그‘동일한 것’ 과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 성의 반복이 주관적 환상에 다름 아니며 그것의 실패 역시『사육장 동일하다. 따라서‘동일한 것’ 은 모두가 상이한 방식으로 의탁하는, 쪽으로』 의 일탈환상만큼이나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극 어떤 탁월한 존재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어법을 빌리자 화한다. 면,‘동일한 것’ 이란 그것이 유사성의 논리를 따라 자체동일한 이처럼 동일성의 반복이 망각의 욕망이 빚어 낸 또 다른 의미의 (identical)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현존재들에게 동 환상이라면 이 환상의 필연적인 실패는 도착적 욕망 주체의‘삶에의 일한(same)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이다. 12 의지’ 의 표현이지‘하드보일드 헬’의 재림을 인증하지 않는다.『저 ‘동일한 것’ 은 바로 존재자들에 의해 상이한 방식으로 공유됨 그 자 녁의 구애』 의 단편들은 출구 없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삶의 자명 체를 뜻하며 우리의 실존적 일상이“각각 다르게 흘러간다” 는 사실 성’ 을 그려낸다기보다 차이 없는 동일성을 꿈꾸는 주체의 욕망이 다 을 망각하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른 어떤 것으로도 교환 가능하지 않은 주체의 표지임을 각인한다. 13 왜 이들은 망각을 욕망하는가. 무엇보다도 하루에 평균“106명이 차이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망각에 머무르려는 주체의 도착적 욕망 죽는”동일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서다.“자 은 환상 너머의‘현실’ 을 갈망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삶의 자 신이 발 디딘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것” 은 통계적으로 보면 매일 명성’ 에 대한 명백한 거부이다. 따라서『저녁의 구애』 를 문명의 야만 반복되는 동일한 반복의 한 계기일 뿐이지만 복사실 사내에게는“중 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은『아오이 가든』 과『사육장 쪽으로』 의 요한 약속” 을 구실로 황급히 빠져나와야만 했을 결코‘동일하지 않 환상세계와 즐겁게 결별하고 있는 편혜영 소설의 진면목을‘순환 은’파격적 사건이다. 망각의 염원은 낯선 사내의 투신 자체가 차이 선’ 의 논리에 결박시키는 독서일 것이다. 그들의 익명성과 망각 의지 는“동일성의 지옥” 을 살아가는 불구(不具)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교 11 이 점에서 단어 하나의 의미까지 기억의 저장고에 남겨두려는 황정은의 소설『백의 그림 환 불가능한‘동일한 차이’ 를 욕망하는 독특성의 표지이다. 그들에 자』 (민음사 2010)의 은교와 무재는 윤리적일지언정 지극히 비현실적 주체이다. 이 소설의 성 취와 한계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권희선의 글「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참조. 12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김재철 옮김,『철학입문』 (까치 1996) 95-99면. 크 리 티 카 KRITI K A 13 김형중, 앞의 글 255면.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84 85 게 현실은‘동일성의 천국’ 이라는 거대한 환상이며‘차이’ 와 마주한 이 환상의 실패 역시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반면,『저녁의 구애』 의 사내들은 이렇다 할 정념이나 리비도의 분 출도 보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식과 초자아의 층위에서도 억압 의 징후를 드러내지 않는다.“늘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인생을 살아 온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화” 「정글짐」 ( )를 내거나 위협적인 청년들을 5. 무의식의 부재 경찰에“대마사범으로 신고” 「크림색 ( 소파의 방」 )하며“무단결근” 「토 ( 끼의 묘」 )을 감행하는 데 만족한다. 스스로가“자신을 비난하느라 위 『저녁의 구애』 에 등장하는 익명의‘사내’ 들이 알레고리적 기표가 축되고 소심해져서 비뚤어진 부류” 는 아니라고 믿지만“되도록 비겁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점이 편혜영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실 해지는 기회를 만들지 않” 고“가급적 일을 원만하게 해결” 「크림색 ( 소 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저녁의 구애』 의 사내들은 동일하게 파의 방」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이른바‘소시민’ 의 전형이 반복되는 현실의 끔찍함을 증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사육장 쪽 라고 부르기도 힘든데,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여하한 종류의 대자 으로』 의 중년남성들처럼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나 일탈을 꾀하는 정 적 계급의식도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14 념의 주체도 아니다. 증언과 파국은 여전히 알레고리적 세계의 산물 아니 계급의식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에 있음 직한 무의식 자체가 이다. 그 세계의 인물들에게는 일상의 동일성을 순순히 버텨내는 의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종이에 살갗을 베는 일이 유일하게 식 내지는 초자아의 층위와‘삶의 자명성’ 을 망각하려는 정념 혹은 상처가 되는 곳에서 복사광의 온기에 위로받으며, 10원 단위의 거스 리비도의 층위가 거울처럼 대면하고 있다. 여기서 환상의 실패는 표 름돈을 꼬박꼬박 내어주” 「동일한 ( 점심」 )는 삶이나 꽁치나 고등어 이 면적으로는 초자아와 의식의 검열을 뚫고 나온 리비도와 정념이 다 외의 것을 기대하며 통조림통을 따는「통조림 ( 공장」 ) 생활을 기꺼이 시금 그 대타자의 명령에 굴복하기 때문에 억압적이지만, 좀 더 심 반복하고자 한다.“재미도 없는 놀이판에 던져진 기분” 「정글짐」 ( )을 층의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대타자에로의 회귀가 애초부터 주체의 느낄지언정“완전한 소멸” 「저녁의 ( 구애」 )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렇기 무의식이 의도한 결과라는 점에서‘쾌감’ 의 흔적이기도 하다. 차이 가 귀환하는 실재의 순간으로 인해 환상이 실패해도 이는 주체의 붕 괴를 가져오기보다`─`그런 점에서「밤의 공사」 는『아오이 가든』 의 논리에 가깝다`─`주체의 도착증의 강화로 귀착된다. 사육장을 탈출 한 개에 물린 어린 아들을 싣고 병원으로 향하는 사내를 사육장 쪽 14‘계급의식의 결핍’ 이 소시민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소시민은 자신들의 계급적 존재를 아래로는 하층계급과 위로는 자본가계급 사이에서‘자율적인’세력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의식의 회피는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감추는 소시민의 이데올로기적 표상에 더 가깝다. 이 점은 황정은의『백의 그림자』 의 주인공들에 대한 평가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 다. 그들을‘철거’ 라는 현실에 저항하는 계급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서정성의 세계에 함몰된 ‘소시민’ 으로 판단하는 일은 사회학적 소설읽기는 될지 몰라도 소설의 사회적 함의를 읽는 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의 무의식이다. 크 리 티 카 KRITI K A 태도는 아니지 싶다.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86 87 때문에 무의식이 부재한『저녁의 구애』 의 사내들의 수동성을 비판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들의 무의식이 발현하는 듯한 거나 그들에게 동일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떨쳐 나올 어떤 급진적인 순간도 실은 무의식을 결여한 주체가 정념의 우연한 분출을 가장하 윤리를 요구하는 일이 허망해진다. 그들은 어쨌든 다소간의 희생을 는 극적독백의 장면과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치르고 얼마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동일한 일상이 끊임없이 반복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사내들은 더 이상 낯선 것 김은 냉담한 말투를 풀었다. 당신이 재촉하면 나는 어른이 빨리 돌아 들과의 싸움에 자신을 걸지 않는다. 세계는 섬뜩한 실재의 귀환을 가시길 기도해야만 돼요.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웃자 김은 다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기이한 것들의 존재를 제거해버 시 조급해졌다. 여자가 언제까지고 그의 진심을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 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아오이 가든』 에서처럼 세상을 알레고리 이었다. 그는 아직도 웃고 있는 여자에게 불쑥 여기까지, 라고 말했다. 여 로 볼 수 있게 만들었던 늪의 어둠, 억압의 흔적이 없다. 예측 가능 자가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뭐가요? 그는 얼른, 농담은 여기까지라고 대 한 일상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내들의 자발적 수동성은 무의식이 답할까 생각했다. (중략) 여자가 되물었다. 뭐가 여기까지예요? 재촉하는 제거된 자들에게만 가능한 제스처이며 지하 복사실의 협소하고 격 여자에게 그가 대답했다. 우리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거요. 여자가 잠시 멈 리된 공간에 정주하려는 몸짓이다. 췄다가 말했다. 팀장이 찾아서 가봐야겠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그분이 무의식의 부재는 그들이 스스로를 표상할 언어, 즉 정념을 상실했 다는 사실의 증표도 된다.「저녁의 구애」 의‘김’ 은“앞으로 여자가 빨리 돌아가시길 빌게요. 전화는 끊어졌다. 홀가분해지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녁의 ( 구애」58면) 있는 순간을 견딜 수 없을 거라는 생각” 을 하면서도“매번 서운해하 (54면)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거듭한다. 투신 는 여자를 달래기 위해” 「동일한 점심」 의 사내에게는 일상의 반복으로 객관화되는 동일성 자살 사건의 목격자로 소환된 주인공은“우리가 민 것도 아닌데 말 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무의식의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과 달리, 입니다” 라고 털어놓으며 각인되지도 않은 죄책감을 포장한다. 요컨 일상의 동일성에서 벗어나려는‘김’ 의 돌연한 결별 선언에는 정념이 대『저녁의 구애』 의 사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무의식의 억압을 의 작동할 수 있는 맥락이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다.“여기까지” 라는 김 식의 차원에서 가장(假裝)하는 행위를 통해 망각의 욕망을 지속한 의 언어가‘그의 진심’ 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그의 진심’ 다. 바로 이 망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외상(外傷)적 기억의 저장소 이 애초부터“여기까지” 라는 말에 담길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다 인 무의식을 제거하고 그 언어를 빼앗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상징계 는 뜻이다. 정념의 분출이 항시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 의 질서정연하고 반복적인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상징계가 파열 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말은 의도(언어)와 결과(결별 하는 실재의 순간이 반복 불가능한‘사건’ 으로 기록될 여지를 허락 행위)간의 화행론적 불일치에서가 아니라 김이 여자를 자신과 동일 크 리 티 카 KRITI K A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88 89 하게 정념을 지닌 주체로, 즉 타자(他者)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편혜영 소설의 달라진 면모를 추적하기에 충분한 실마리다.“진심과 다. 무의식의 언어로, 정념의 주체로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수화기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62면) 그가 벌이게 된 단 한 번 건너편의 여자이며`─` “그분이 빨리 돌아가시길 빌게요” `─`무겁게 내 의 정념 행위가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죽음 려앉은 그의 마음은 정념을 가장한 그의‘홀가분함’ 에 대한 기대가 을 기다리며 시도했던 결별의 충동이 정념을 가장한 이기심의 표현 물거품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자 타자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면 느닷없는‘구애’ 의 행위에 「저녁의 구애」 의 김은 애초부터 정념의 주체가 아니다.“여자의 서는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무엇이 그의 변화를 이끌었는가. 마음 씀씀이와 달리 상자를 열거나 포장지를 푸는 김의 손이 떨” 린 결별과 사랑의 고백 사이에, 김은 어둠 속을 달리는 마라토너의“완 적은 한 번도 없고 김이 좋아하는 냄새 역시“딱히 냄새라고 할 수는 전한 소멸” 과 전복되어 불꽃에 삼켜진 트럭의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45면)다.“누군가가 죽기를 기다리는 40여 분에 대해 없” 는“무취” 이 두 사건은 물론 김에게 죽음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동시에 깨닫게 생각” 하지만“대부분은 그저 멍하니 식당의 유리문 밖을 보” (49면)는 만들지만,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일은 흰 점이 되어가는 마라토너와 인물이다.“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할 게 없” 는그도 휘파람을 불다가 사고를 당한 트럭운전자에게서 김이 스스로를 무 시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여자에게 전화를 걸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의식의 주체로 구축하는 동시에 그 환상의 끔찍한 실상과 대면하게 “재난에 대비하는 통조림” 을 수소문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에게 된다는 사실일 터이다. 그는 마라토너의 소멸에서“보이지 않는 곳 여자와의 사랑은“보존 기한이 8년” 인 어묵 통조림처럼“비상시가 에도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 을 간직하고 싶어 하지만 바 아니고는 먹을 수 없는 맛” 이 담긴 관계일 뿐이다. 이렇게 김은 여자 로 그 순간“김의 시선에 놀란”트럭의 사고를 유발한 존재가 되어 가 자신의 욕망의 대상임을 언술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욕망의 대상 버리는 것이다.“누구나 이기적이므로 누구에게든 이기적이라고 비 이 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셈인데, 김이 가장 두려워하는 (40면)다고 생각했던 그 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지 못하” 것은 자기 무의식의 주체가 되는 일, 달리 말하면 여자의 욕망을 욕 의 이기심은 치명적 무기가 되어‘삶의 자명성’ 과‘동일성의 천국’ 을 망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탈바꿈하는 일이다. 욕망하는 그의 거짓 믿음을 산산이 파괴한다. 그래서 사고 직후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자에게 전화를 거는 대목은 그가 망각의 욕망이나 정념의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구 6. 구애의 정치학 그럼에도「저녁의 구애」 의 김은 이 소설집의 다른 사내들과 달리 크 리 티 카 KRITI K A 애에까지 이르게 되는, 지극히 상투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결말이다. 한참만에야 전화를 받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통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90 91 해 여자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면서 규칙적인 소리였다. 라고 말하기는 힘든 구석이 많다는 점이다. 김의 고백은 여자와“숨 그 소리가 묘하게도 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김은 여자의 숨소리에 맞 의 간격” 을 맞추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관계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춰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여자와 호흡을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 숨을 위한 행동이지만, 먼저 번 전화 이후 김의“여기까지” 라는 말의 의미 뱉아야 했다. 몇 번의 시도에도 숨의 간격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김은 불 를 거듭 곱씹었을 여자의 침묵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도 하다. 정념 쑥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여자는 잠자코 있었다. 여자가 아무 말도 은 여자에게서 김에게로 옮아간다.“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 하지 않는 것이 두려웠지만 어떤 대꾸를 하는 것도 두려워서 오로지 여 았던”느낌을 마주한 김의 구애는 그를 욕망의 주체로 전화시킨다. 자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유심 여기서 김의 구애는 정확히 여자(타자)의 욕망`─`구애의 주체가 되고 히 여자를 바라보는 기쁨을, 여자와 처음으로 우연히 팔꿈치가 스쳤을 자 하는 여자의 침묵`─`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때 박동한 심장을, 처음 여자의 손을 잡았을 때 거짓말같이 여겨지던 낯 김은 여자에 의해 비로소‘무의식의 주체’ 로 재탄생한다. 선 감각을, 그를 차분하게 하는 부드러운 숨소리를 얘기했다. 여자에게 그 욕망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 홀가분함을 느끼려는 이기적 사랑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여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 자기기만이 아니라“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았던 순간의 설렘을 얘기했다. 얘기를 하는 동안 김은 여자에게 말한 것 않는 말” 을 하는 주체가 스스로 그 말이“진심처럼 들리기도 했” 음 들이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을 깨닫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김은“여자에게 그 말을 하 모두 어디서 읽거나 누구에게서 들은 얘기 같았다. 너무 상투적이고 진 는 내내 자신이 몹시 낯설게”느껴지는 경험을 하며, 그 느낌으로 인 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이었다. 반면에 그래서 진심처럼 들리 (62면)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해“고백의 일부가 진심일지 모른다” ( 구애」60-61면) 기도 했다. 「저녁의 다.「저녁의 구애」 의 김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다른 사내들, 예컨 대「동일한 점심」 의 복사실 사내와 동일한 일상에 발 담그고 있지만 이 대목이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힘 이렇게 타자의 욕망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복사실의 사 들다. 하지만 사고 순간 김이‘시민’ 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보다 여 내가 일상이 동일하기를 환상함으로써 매일의 삶이 다르다는 사실 자에게 전화를 거는 까닭을 자기보호 본능의 발로나 실존적 두려움 을 망각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김은 여자를 통해 적당한 의 표출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별로 없다. 여기서 독자의 주목을 끄 거리를 둔 타인과의 관계가 반복적 일상으로부터 안도감을 줄 수 없 는 것은 과연 무엇이 김을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사랑의 고백으 음은 물론 그런 관계에 대한 환상이 실은 자신의 욕망을 가장하는 로 이끌었는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목이 표면적으로는 김의 행위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사랑 고백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진정한 고백의 주체가 김이 크 리 티 카 KRITI K A 고백의 행위 뒤에“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또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92 93 다시 반복될지 모를 구애의 반복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차 알레고리의 세계를 박차고 나와 구애의 대상에게 고백하거나 동일 이’ 를 회피하지 않으려는‘무의식 주체’ 의 결단에서 보자면,『저녁의 한 점심을 먹을 또 다른 사내를 찾아 나설 때 정말로 완성될지 모르 구애』 의 다른 사내들이 동일한 일상의 반복 한가운데서 동일하게 느 겠다.『저녁의 구애』 가 그런 교환 불가능한 세계로 들어가는 편혜영 꼈던 안도감은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해진 세계에서‘동일한 차이’ 를 작가의 길잡이일 가능성은 없을까. 구애의 정치학에서 더 나아가, 욕망하는 윤리적 선택일지언정 교환 불가능한 타자의 욕망에 스스 편혜영의 소설에 망각과 가장에 능한 사내들이 아니라 그들을 무의 로를 내맡기는 정념적 주체의 행위는 아닐 것이다. 이를 구애의 정 식의 주체로 이끄는 여성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갈 빛나 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진정성이 탄생하는 순간은“초록 버 는 순간을 기대해본다. 튼을 누르면 나오는 복사광” 의 빛을 바라보다가“눈이 시려”위안의 ( 점심」73면)가 아니라“마음에 인 감정 “눈물” 을 흘리는 찰나「동일한 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욕망의 주체가“땅에 박힌 듯 멈춰 서서 조등처럼 환히 빛나는 그 불빛” 「저녁의 ( 구애」62면)의 의미를, 그 사건 의‘차이’ 를 사유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긴 해도, 동일한 일상이 주는 기시감과“기이한 안도감” 『재와 ( 빨강』218면)을 위해서 자신의 정념과 타인의 죽음도 동일성의 환상 에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편혜영표 사내들이 김의 선택과 달리 쉽사리 지하 복사실 너머의 세계로 나설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여자를 사랑하게 된 김처럼, 그들도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그 기이한 편안함을 계속 즐겁게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상징계가 파열하는 타자의 죽음과 실재의 순간 앞에서“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남은 빛” 은 사내들의 감각에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아오이 가 든』 과『사육장 쪽으로』 의 악몽 같은 섬뜩함은 언제든 그 일상의 일 그러진 얼굴로 귀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일상은 권태이 15 고, 남루한 덫인 동시에,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다. 일상이 ‘사건’ 으로 전화되는 그 구애의 순간은 아마도 편혜영의 사내들이 크 리 티 카 KRITI K A 15 정은귀, 앞의 글 175면.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94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