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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화장

다른 표기 언어 cremation , 火葬

요약 시체를 태워 장사하는 관례.

목차

접기
  1. 역사
  2. 현대의 화장
  3. 한국의 화장
화장(cremation)
화장(cremation)

역사

노천에서 불을 피워 화장하는 풍습이 서양에 처음 도입된 것은 BC 1000년경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그리스 종교).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 낯선 땅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장례를 고향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르기 위해 어떤 북방 민족으로부터 화장법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싸움터에서 시체를 소각한 다음 그 재를 모아 고향으로 보내어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하게 했다. 〈안티고네 Antigone〉에서와 같이 시신 위에 상징적으로 흙을 뿌려서라도 토장(土葬)의 요건을 갖추려고 하는 등 토장의 풍습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화장이 용기와 남성적인 미덕, 애국심, 군인으로서의 영광과 아주 밀접히 연관됨으로써 그것은 대서사시의 영웅에게 합당한 유일한 최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일리아스 Iliad〉는 화장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그의 아버지인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에게 넘겨주어 왕자의 예우로 화장을 받을 수 있게 하라고 강요한다. 위대한 인물의 화장일수록 불길이 더 크게 치솟아오르도록 하는 관례에 따라 아킬레우스는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사방 30m의 장작더미를 쌓게 한다.

아킬레우스 자신은 그의 사후 17일간의 애도기간이 지난 뒤 훨씬 더 영광스럽게 '신들의 옷을 입은 채'로 화장된다. 포도주로 불을 끈 후 그의 유골은 기름과 포도주로 씻겨져 파트로클로스의 유골과 함께 황금으로 된 단지에 안치된다. 흥청망청한 장례 만찬과 오락이 뒤따르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한 갑에 그의 거대한 분묘가 세워진다.

로마인들은 전쟁 영웅들을 그리스와 트로이의 화장법에 따라 장사지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 Aeneid〉에서 '부적절한' 라틴족의 화장법을 경멸하면서, 이를 로마인의 트로이 조상들의 풍습과 대비시켰다. 베르길리우스는 양군이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선포된 12일간의 휴전기간에 라틴족이 많은 전사자를 의식을 거행하지도 않고 태운 후 뼈들을 한데 모아 흙더미로 덮었다고 기술했다. 반면 로마인은 모든 절차를 준수하여 화장을 했다고 기록했다.

즉 장작더미를 나뭇잎으로 덮고 그 앞에 삼나무를 세웠으며,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후 공격의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그들이 죽인 라틴 군사들에게서 탈취한 전리품들을 불 속에 던지고 짐승들의 피를 쏟아부었다. 그후 불이 꺼지면 유골들을 포도주로 씻어 유골 단지 속에 넣었다. 화장이 로마에서 아주 중요한 신분적 상징이 된 결과 콜룸바리움, 즉 벽에 납골 벽감(壁龕)이 마련되어 있는 둥근 천장의 지하 무덤을 건축하는 것이 수지맞는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AD 100년경에는 로마 제국에서 화장이 중지되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전파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화장이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명백히 금기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권장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화장이 이교도적이며 약속된 육신의 부활 및 영혼과의 재결합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워낙 많은 나무가 화장을 위한 장작용으로 벌채됨으로써 땔나무의 부족 사태가 심각해질 염려가 있다는 점이었다(로마 종교). 스칸디나비아의 이교도들은 화장이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며 또한 죽은 자가 산 자를 해치는 것을 막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장을 계속했다.

그들의 화장법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영웅을 화장하는 방법과 유사했다. 1000년 아이슬란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 화장은 서유럽에서 19세기까지 자취를 감추었지만 비상시에 예외적으로 시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656년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을 때 나폴리에서는 단 1주 동안에 흑사병으로 죽은 6만 구의 시신이 불태워졌다. 오랜 화장 풍습을 가지고 있는 인도와 그밖의 몇몇 나라에서는 화장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바라나시에서 화장되는 것은 모든 독실한 힌두교도들의 소원이다. 성도(聖都)의 강변에는 장작더미를 쌓는 콘크리트 단과 대리석 단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화장 후 유해는 갠지스 강에 뿌려진다. 아시아의 몇 나라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화장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티베트에서는 화장이 라마교의 고승들만이 받는 특혜이며, 라오스에서는 '복 받고'(즉 평화롭고 순탄한 인생 끝에 천수를 다하고) 죽는 사람들에게만 행해진다.

발리에서는 화장의 의식이 화려하고 즐거운 것이다. 가매장 또는 방부 처리된 다수의 명사들의 시신을 '길일'(吉日)을 택해 목재로 높이 쌓아올린 장식 탑으로 옮겨 화장한다. 42일 후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시신 대신 인형을 올려놓은 2번째의 탑을 태운다. 그 탑들의 재는 유해와 함께 물 위에 뿌려진다.

현대의 화장

현대식 화장은 고대의 것과는 아주 다르다. 시체를 작은 방에 집어넣고 고온으로 가열하면 시신은 1~2시간 만에 재로 변한다. 재는 정원이나 그밖의 장소에 뿌리거나, 유골 단지에 담아 집 안에 보관하기도 하며 공동묘지에 매장하거나 납골당에 안치하기도 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화장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1874년 빅토리아 여왕의 주치의인 헨리 톰슨 경이 그의 저서 〈화장:육신의 사후 처리 Cremation:The Treatment of the Body After Death〉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앤소니 트롤로프, 존 테니얼 경, 베드퍼드 공작과 웨스트민스터 공작, 그밖에 매장 풍습을 공공연히 비판하던 사람들과 함께 영국 화장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884년에 비로소 화장이 합법적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화장은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1세기 이상이나 사회·종교 분야의 개혁자들은 시체를 매장하기 전에 행해지는 지루하고 무질서한 철야의식을 비판했었다. 의사와 위생기사들은 공동묘지의 매장 실태를 보고 놀라 포화상태의 장지가 유해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에서 즉각 행동으로 옮겨져 1876년 펜실베이니아 주의 워싱턴에 최초의 화장터가 건설되었다. 5년 후 뉴욕 화장협회가 조직되었고, 1913년에 미국 화장연합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실제로 화장되는 비율의 증가는 완만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도 사망자의 8%만이 화장되었다.

화장은 유럽과 아시아의 몇 나라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영국·독일·덴마크에서는 화장률이 50%를 넘는다. 일본에서는 1875년에 한때 화장이 불법화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도시권에서는 묘지 구입이 점차 어려워지고 반대 의견에 대한 대응책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장차 화장이 가장 일반적인 매장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많은 개신교 교회들은 화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도 화장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정통 유대교는 화장을 계속 금지하고 있다.

화장이 범죄를 은폐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법조계의 반대는 검시관의 검시기술 등의 향상으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묘지 소유자들과 장의사들 역시 화장이 전통적인 매장 방법에 비해 수익이 적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로는 화장에 대해 거의 반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화장

한국에 화장이 전래된 시기는 대략 삼국시대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유소에 '依西國之式 以火燒葬'이라고 한 것에서 삼국통일 초기에 이미 화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효성왕·선덕왕·원성왕이 각각 유명으로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그 증거로 이 시대의 화장골호가 여러 개 발견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리탑부도가 많이 있어 화장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불교에서 행해진 이러한 장례를 다비 또는 도유라고 하며, 일반적인 화장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화장 후에는 사리를 수습하여 다시 봉안하는데 이 사리에는 영혼이 깃들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의 장례법이 장려되어 차츰 사라져갔다.

그후 1912년 일제강점기에는 '묘지·화장·화장장에 대한 취체 규칙'에 의해 화장이 강요되었으나 정착되지 못했다. 현대에 이르러 인구의 증가, 농지·임야 면적의 개발로 묘지 확보의 어려움이 있자 점차 화장 풍습이 확대되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