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up one dir, main page]

임나

임나

다른 표기 언어 任那

요약 6가야의 하나인 금관가야의 다른 이름.

일본 기록에서는 낙동강 유역의 여러 가야국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나온다. '임나'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것이 금관가야를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삼국사기〉 강수전에서 강수가 스스로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924년(경명왕 8)에 건립된 진경대사탑비에서 대사의 출자(出自)를 '임나왕족'(任那王族)이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대사는 속성(俗姓)이 신김씨(新金氏)로서 금관가야 왕족이었던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이므로 여기서의 임나는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우리나라 기록에서 임나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일본 역사책에서는 가야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나 임나관가(任那官家)를 말할 때 쓰고, 때로는 그 세력이 미친 가야국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으로도 썼다(→ 임나일본부설). 일본인들은 임나를 미마나(mimana)로 발음했다.

여기서 임(任)은 주(主)·왕(王)의 뜻이고 나는 나·내의 한자음 표기로서 고어의 들판·평야·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임나가 어떤 나라의 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던 것이 나라이름으로 바뀌어 고유명사화 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임나의 기원을 왜(倭)가 가야지역에 설치했던 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와 연결시켜 수진[崇神] 덴노의 이름을 기념하여 '미마나'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주장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다만 임나일본부·임나관가라는 명칭으로 보아 왜의 세력이 어떤 형태로든 가야지역 정치에 관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되는데, 그 간섭의 정도는 많은 논란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왜가 낙랑군(樂浪郡)·대방군과 해상무역을 활발히 벌일 때, 김해지역과 그 근처지역을 중계지로 삼았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보인다.

북한 학계에서는 일본의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임나, 즉 미마나를 일본 열도 안에 있었던 가야 계통의 이주민이 세운 나라로 간주하며, 그것이 6세기경부터 점차 가야 본국으로부터 떨어져서 야마토[大和] 왕정에 통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임나일본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