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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

을사의병

다른 표기 언어 乙巳義兵

요약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체결되고,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어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을미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양반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유생 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이 변화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다.

의병
의병

먼저 1904년 7월 서울 교외의 조선군인들이 일본의 만행에 격분하여 반일의병부대로 전환한 이후, 원주·단양·제천·죽산 등 중부일대에서 의병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에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에서 중군으로 활약했던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은 1905년 9월 원주 동쪽인 주천(酒泉)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했다.

그러나 활동도 개시하기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 회원의 습격을 받아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 부대의 의병들은 소규모의 부대로 분산하여 죽령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추진했다.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것은 홍주(洪州)의병이었다. 1906년 3월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채광묵(蔡光默) 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홍주성을 점거하려 했으나, 도중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실패했다. 한편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도 1906년 3월경부터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유생들을 규합하고 의병을 모아 봉기를 추진하다가, 그해 5월 11일 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 등과 함께 홍산(鴻山)에 모여 봉기를 최종 결정하고 의군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서천(舒川)·남포(藍浦)·보령(保寧)·결성(結城)을 거쳐,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민종식 의병은 성의 탈환을 노리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5월 31일 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후 홍주의병은 충청·전라 각지에 흩어져 수천 명 혹은 100여 명의 부대로 꾸준히 항쟁을 계속했다. 한편 전라도에서는 1906년 6월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남도 태인에서 임병찬(林炳瓚) 등과 함께 봉기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에서 봉기한 이들은 정읍을 거쳐 7일에는 순창에 입성했고, 이어 담양방면으로 행군하다가 전주·남원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최익현의 거병은 그가 위정척사사상의 선봉에 서왔기 때문에 곧 전국적인 의병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강원도·경상북도 접경지대에서도 여러 의병부대들이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맹렬한 반일항쟁을 전개했다. 특히 1906년 4월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적출신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는 한때 그 수가 3,000여 명에 달했고, 그후 경상도와 강원도의 동해안을 따라 왕래하면서 항쟁을 계속했다.

또한 영천(永川)의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 등이 경상도 전역을 망라하여 영남 최대의 의병진인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이루고 활동했다. 이외에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예안의 김도현(金道鉉), 경주의 유시연(柳時淵), 황간(黃澗)의 노응규(盧應奎)가 의병진을 형성하여 활동했다. 을사의병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1895년의 을미의병과 큰 차이가 없었다.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여전히 양반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유생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또한 전투력에서도 무기와 편제가 조잡하고 민병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화되고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반침략·반봉건 지향이 전면에 등장하고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은 변화하게 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