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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이방자

이본궁 방자, 李方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요약 테이블
출생 1901년 11월 4일
사망 1989년 4월 3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비. 일본 황족으로 태어났으나 황태자 이은과 부부로 맺어지면서 불안한 운명의 첫 발자국을 내디었지만 그녀는 고독한 남편 이은의 반려자로서 그의 아픔을 달래주었고, 타고난 절제의 미덕과 따뜻한 심성으로 덕혜옹주를 비롯한 여러 왕족들을 돌봐주었다. 국내에 들어온 뒤에는 각종 사회사업에 열정을 기울임으로써 세인들에게 고귀함이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목차

접기
  1. 일본의 황족으로 태어나다
  2. 정략결혼이 추진되다
  3. 고종의 죽음, 연기된 혼사
  4.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결혼
  5. 아들 진의 애달픈 죽음
  6. 시누이 덕혜옹주를 돌보다
  7. 일본의 패망, 불투명한 미래
  8. 귀국, 아름다운 말년

‘결혼이 다른 어떤 결합 형식보다 뛰어난 점은 남녀에게 서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동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앙드레 모로아의 이 명언은 일제강점기 정략결혼의 희생자였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면서 평생의 동반자로 살았던 이방자와 영친왕 이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만 같다.

이방자는 일찍이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일한융화(日韓融和)라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과 부부로 맺어지면서 불안한 운명의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녀는 고독한 남편 이은의 반려자로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그의 아픔을 달래주었고, 타고난 절제의 미덕과 따뜻한 심성으로 덕혜옹주를 비롯한 여러 왕족들을 돌봐주었다. 말년에는 이 땅의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사회사업에 열정을 기울임으로써 소외받던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일본의 황족으로 태어나다

이방자(李方子)
이방자(李方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일컬어지는 이방자(李方子)는 1901년 11월 4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인데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한 뒤 남편의 성씨를 물려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이지천황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로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황족으로는 유일하게 전범 재판에 회부된 뒤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인물이었고, 어머니 이스코(伊都子)는 메이지유신에 공헌했던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弘)의 딸이다.

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친왕은 닌코천황의 조카이자 메이지천황의 사촌이었으며, 이복삼촌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王)는 메이지천황의 딸 도시코(聡子)공주와 결혼했고 전후 일본의 제43대 내각 총리를 지냈다. 이처럼 일본의 유서 깊은 가문의 장녀였던 이방자는 부모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년 12월 15일, 조선의 황태자 이은이 10세의 어린 나이에 신식교육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에 도착했다. 이때 도쿄 신바시 역에 요시히토 황태자를 위시하여 많은 황족들이 마중을 나갔는데 그 행사에 만 10세였던 이방자도 어머니 이스코와 함께 참여했다.

1908년 봄, 이방자는 황족과 화족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학습원 여학부 소학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학습원장은 러일전쟁 당시 뤼순을 점령하여 영웅이 된 오기(乃木希典) 대장이었다. 학습원 재학 시절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황후의 꿈을 꾸었다. 히로히토 황태자가 학습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 방향이 같아 함께 통학했던 사촌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好)는 훗날 히로이토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 무렵 이방자는 황실의 행사가 있을 때 종종 이은을 만났다. 이은은 1909년 9월 14일 그녀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고, 나고야에서 그녀의 아버지 모리마사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탄되자 이은은 비탄에 젖었지만 이방자로서는 조국의 영광에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정략결혼이 추진되다

영친왕
영친왕

1910년 가을, 이방자는 아오야마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이사했다. 교토의 황궁에 견줄만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전에 살던 집은 일찍이 을미사변을 지휘했던 미우라 고로(三浦梧楼)가 지은 집이었는데 궁내성에서 구입하여 나시모토미야 가문에 기증한 집이었다. 이은은 명성황후의 법적인 아들이었고, 그의 부인 이방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수괴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실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1915년 가을부터 일본 황실에서 이은과 이방자의 혼인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혼사가 확정되자 법적 절차에 따라 그 내용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해 황실에 상신되었고 천황의 재가까지 받았다. 그리하여1916년 8월 3일 경성에서 고미야 이왕직 차관의 담화를 통해 두 사람의 혼약이 공표되었던 것이다.

이방자는 훗날 자서전 《흘러가는 대로》에서 자신은 당일 신문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또 다른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에서는 그녀가 어머니 이스코로부터 혼담이 확정된 사실을 전해들은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그녀는 황족의 일원으로서 황실의 결정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당시 강제 퇴위 당한 채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은 두 사람의 혼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차관 고쿠보가 찾아와 혼사를 제의하자 선선하게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혼사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 황실에서는 이 결혼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지 추밀원에 자문을 구하고 황족회의를 열어 《황실전범》에 부칙을 넣기까지 했다.

고종의 죽음, 연기된 혼사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결정되었다. 그와 함께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서는 영친왕의 저택으로 이방자의 일상용품을 옮겨놓았다. 경성에서는 1월 20일 순종과 윤비의 사자로 윤덕영, 고종의 사자로 김춘영, 친족 대표로 윤택영·조동윤, 귀족 대표로 이완용·송병준·민영찬 등이 선발되어 일본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건이 결혼식의 발목을 잡았다. 예식을 사흘 앞둔 1월 22일 고종황제가 승하했던 것이다.

일찍이 고종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이준·이상설·이범준 세 사람을 파견했다가 실패한 뒤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보위를 넘겼다. 그 와중에 고종이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를 삼자 일본은 유학 명목으로 그를 일본에 데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은 1919년 1월, 열강들이 개최한 파리강화회의에 또 다시 밀사를 보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었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상하이에 있던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뜻에 따라 은밀히 해외망명을 추진했다. 당시 그는 이은이 마사코와 결혼하게 되면 조선 왕실의 맥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반격의 한 수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토록 반대했던 황태자 이은의 혼사를 선선하게 승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고종의 태도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과거 베이징에 있던 신한혁명당본부의 본부장이었던 이상설이 외교부장 성낙형을 통해 고종의 해외망명을 추진하다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20일, 혼인축하사절을 일본으로 파견한 고종은 밤늦게 식혜를 마신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극심한 두통과 복통이 몰려와 혼절하고 말았다. 급보를 받은 순종이 이튿날 아침 일찍 고종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일본인 의사는 사인을 뇌일혈이라고 밝혔지만 세간에는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범인으로 구체적으로 장시국장인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 윤덕영이 지목되기까지 했다.

일제는 조선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고종의 국장을 서두르는 한편 이은과 이방자의 혼사를 1년 뒤로 연기했다. 그러나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널리 퍼지면서 조선 민중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마침내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해 내내 지속된 조선의 만세운동과 일제의 가혹한 진압은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정략결혼의 당사자였던 이은과 이방자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예정되었던 결혼식이 한 해 뒤로 미뤄지자 두 사람은 모처럼 여유로운 기분으로 매주 일요일에 데이트를 즐기면서 남다른 애정을 쌓아 나갔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결혼

1920년 4월 28일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식이 도쿄의 롯본기에 있는 이왕가 저택에서 치러졌다. 그렇지만 이 혼사는 조선인들에게 대한제국 황실의 정체성을 우롱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일종의 쇼로 인식되었으므로 국내외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서는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결혼식 날에는 테러 시도까지 있었다. 이방자의 어머니 이쓰코의 자서전 《3대 천황과 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마차가 도리이자카의 대저택 정문에 가까이 갔을 때입니다만, 누군가가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돌보심이랄까. 그것은 불발 상태로 데굴데굴 굴러 행렬의 속도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저택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한데 이 내용은 그녀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들은 풍문을 사실처럼 기록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서상한이라는 조선인 청년이 결혼식 관계자의 폭살을 노렸지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니시간다 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되었던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뒤 조선총독 사이코 마코토는 특별 포고문을 통해 두 사람의 결합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이라고 칭송했다. 정무총감 미즈노는 또 결혼기념으로 3천 명의 정치범을 감형하거나 석방했다. 이들은 대부분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 구금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들 진의 애달픈 죽음

이방자는 결혼 1년 4개월 뒤인 1921년 8월 18일에 맏아들 진(晉)을 낳았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말 그녀는 아들 진과 함께 남편을 따라 현해탄을 건너갔다. 경성에 도착한 이은 부부는 창덕궁에 들어가 이왕 순종을 배알하고 종묘에 혼인을 고했다. 이어서 총독부 요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들을 접견하고 연일 성대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이었던 5월 8일 그들에게 비극이 덮쳤다. 여느 때처럼 우유를 먹은 진이 갑자기 설사와 구토를 하더니 호흡곤란에 빠졌다. 전의들이 서둘러 응급조치를 한 덕분에 고비를 넘겼지만 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청록색 덩어리를 토하며 신음하더니 5월 11일 오후 3시경 숨이 끊어졌다.

이 사건을 고종의 독살에 대한 보복이거나 일본인의 핏줄을 끊으려는 조선인의 소행으로 단정한 이방자는 왜 자신을 겨냥하지 않았느냐고 부르짖으며 자식의 차디찬 주검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며칠 후 자식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이방자는 고통스런 심경을 달래기 위해 불교경전 필사에 몰두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일본에 간토대지진이 엄습했다. 인구가 밀집된 도쿄 및 가나가와(神奈川) 일대를 폐허로 만든 이 대지진은 대화재까지 겹쳐 사망자가 9만 9천여 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집계조차 불가능했다. 그때 시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광기 어린 일본인들의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자 이은 부부는 궁내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시누이 덕혜옹주를 돌보다

1925년 3월 30일 경성의 히노데 소학교에 다니던 시누이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방자보다 열한 살 아래인 덕혜옹주는 고종이 늘그막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고명딸이었다. 그 무렵 그녀가 고종의 기억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존재로 떠오르자 일제는 영친왕 이은처럼 유학을 빙자하여 조선인과 격리시킨 것이었다. 덕혜옹주는 오빠 이은의 집에 머물며 학습원에 다녔는데, 그녀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시누이 이방자의 몫이었다.

1926년 3월 1일 이은 부부와 덕혜옹주는 경성으로 가서 병석에 누워있던 순종을 찾아 뵙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순종이 3월 14일 서거하자 재차 현해탄을 건너가 6월 10일에 열린 국장에 참여했다.

순종 장례식,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순종 장례식,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순종의 죽음으로 왕세자였던 이은은 이왕이 되었고 부인 이방자는 왕비의 신분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 황실에 부속된 이왕가의 상징적인 수장이었으므로 즉위식은 없었다. 그 후 이방자는 왕비의 자격으로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발효될 때까지 모든 황실 의식에 참여했다.

이방자는 1927년 5월 23일부터 1928년 4월 9일까지 근 1년여 동안 남편과 함께 유럽 순방길에 나섰다. 당시 일본정부는 이왕가의 새 주인이 된 이은 부부를 파견하여 유럽 각국으로부터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각인시키려 했던 것이다.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콜롬보, 수에즈 운하를 거쳐 마르세유, 파리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그들은 이어서 영국과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웨덴 등지를 두루 살펴본 다음 고베를 통해 귀환했다.

1929년 5월 30일, 경성에서 비보가 들려왔다. 덕혜옹주의 생모 양귀인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은 부부는 덕혜옹주를 데리고 서둘러 경성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양귀인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생모의 초상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덕혜옹주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고종의 독살,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 불참에 따른 충격, 외로운 유학 생활로 인해 그녀는 점차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1930년 3월 3일, 이은 부부는 아자부 도리이자카에 있는 저택을 궁내성에 반환하고 가티시라키야(北白川)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덕혜옹주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갑자기 한밤중에 무작정 집을 나가기까지 했다. 시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이방자가 병원에 데려가 보니 조발성치매라는 진단이 나왔다. 정신이상 초기 증세였다.

이와 같은 덕혜옹주의 증상은 황실에도 알려졌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과거 이은 부부처럼 그녀를 정략결혼으로 내몰았다. 상대는 쓰시마 번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였다. 이방자는 불쌍한 시누이의 행복을 빌어주었지만 영혼의 거처를 잃은 그녀의 미래는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일본의 패망, 불투명한 미래

1931년 12월 29일, 이방자는 둘째아들 구(玖)를 낳았다. 맏아들 진을 잃은 지 10년 만에 경사였다. 아사히신문은 호외를 통해 ‘오전 8시 22분 옥구슬 같은 왕자를 분만하셨다.’고 보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이방자는 몹시 바빠졌다. 황후를 대신하여 상이군인 위문 및 전사자 위령, 자혜회 총회, 일본적십자사총회, 여자학습원 졸업식 등에 참여해야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방공훈련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함께 일본을 지배하게 된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새로운 헌법제도를 추진했다. 그리하여1947년부터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따라 이은 부부는 왕공족의 특권을 상실했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이제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이었다.

이은은 이제는 왕족이 아니라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조기귀국을 기대했지만 급변하는 정치현실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왕정복고 분위기를 경계한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1950년 2월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은 부부가 귀국 의사를 비쳤지만 냉담한 반응만 얻었다.

이방자는 종전 이후 남편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요정을 찾는 등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1950년 8월 3일 아들 이구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켄터키 주에 있는 사립고교에 들어갔다. 1955년 6월에는 이은 부부는 김을한 기자가 보도한 덕혜옹주 기사 때문에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키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지자 두 사람의 이혼을 중재했다. 그로 인해 부부는 옹주의 막대한 병원비를 떠맡게 됨으로써 경제사정이 악화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귀국, 아름다운 말년

1956년 11월, 이방자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구의 졸업식에 참여한 뒤 뉴욕에서 함께 머물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단란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1958년 3월, 이은이 뇌혈전 증세로 실어증에 빠졌고 보행까지 불가능해졌다. 얼마 후 그의 증세가 좀 호전되자 이방자는 서둘러 남편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2년 뒤인 1960년, 한국에서는 삼선개헌과 부정선거의 여파로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무렵 이방자는 유방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남편 이은은 뇌연화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이 희미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등 정세가 급변했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나선 박정희는 중간기착지인 일본에 도착했을 때 영친왕에게 꽃바구니를 보냈다. 그러자 이방자 여사는 답례차 영빈관으로 그를 찾아가 귀국을 약속받았다. 그 결과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가 귀국했고, 1963년 11월 22일 이은 부부 역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때부터 이방자는 한남동에 있는 외국인아파트를 거처로 삼고 평소 남편과 함께 구상했던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했고, 1966년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는 자행회를, 1967년 언어장애인과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명휘원을 설립했다. 부족한 자금은 해외모금활동과 칠보판매자금으로 충당했다.

1970년 이은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사회사업과 남편에 대한 추모 사업을 병행했다. 1971년 지적장애아들을 위해 수원에 자혜학교를 설립했고, 1973년에는 숙원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덕혜옹주의 곁을 지켜주던 이방자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9일 후인 30일에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열정은 삶을 거룩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이방자는 정략으로 흔들릴 뻔했던 자신의 삶을 인내와 정성으로 바로잡았고, 국내에 들어온 뒤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음으로써 세인들에게 고귀함이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로 인해 한국인들은 오늘날 그녀를 일본 여인 마사코가 아니라 조선의 어머니 이방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낙선재

참고자료

  •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강용자 지음, 지식공작소, 2013
  • ・ 조선의 황태자비 이방자 평전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 오타베 유지 지음, 황경성 옮김, 동아일보사, 2009
  •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역사공간, 2008
  • ・ 〈이방자의 자전을 통해본 한·일 근대사에 대한 자각과 한계〉 A study on the a historical view of YI PangJa`s biography, 노영희, 일어일문학연구 제39집-문학·일본학 편(200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