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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근대 신문은 어떻게 보도했나?

안중근 의거, 근대 신문은 어떻게 보도했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영웅이겠지만 조선으로서는 원수였다. 그는 대한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을사늑약 조인을 강요했고,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켰을 뿐 아니라, 일본 황실에 진상하기 위해 귀중한 문화재를 무단 반출했다.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청년 안중근(安重根)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 의거는 조선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일병합을 추진하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응징했다는 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를 시찰하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할 예정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나갔던 러시아 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고 조금 후 세 발의 총성이 들렸고, 그는 쓰러졌다. 러시아 군인 몇 명이 안중근을 덮쳤고, 격투 끝에 권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68세로 생을 마감했고, 러시아 철도경찰대 숙직실에 구금된 상태로 그 소식을 들은 30세의 안중근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역에 내리는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그가 쓰러지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리는 사진을 보면, 러시아와 일본의 공식 사진사도 있었다. 그런데도 저격 장면이 담긴 사진이 없다는 건, 당시 사진기로는 사진을 빨리 찍을 수 없어 그 순간을 놓쳤거나, 사진사가 총소리에 놀라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황성신문〉 1909년 11월 21일자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참화를 당하는 모습을 찍은 활동사진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촬영한 사람은 하얼빈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인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활동사진 촬영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는 이토가 러시아 대신과 만나는 장면, 안중근이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7연발 권총으로 이토를 저격하는 장면, 비서관 등 수행원들이 놀라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고 한다. 이 필름을 구입하려는 경쟁이 심했지만 〈재팬프레스〉에서 15,000원에 구입했고, 다음 달 10일경에 도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는 기사가 ‘흉악한 행동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저격 장면을 촬영한 필름이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활동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고, 당시 저격 장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군사 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7일자 1면에 실린 삽화와 일본 신문에 실렸던 그림의 흑백 도판이 전할 뿐이다.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7일자 1면에 실린 삽화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7일자 1면에 실린 삽화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의 삽화는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고 안중근 의사가 제압당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에 노란 옷을 입고 권총을 든 채 제압당하는 이가 안중근 의사다. 당시 상황에 대해 안 의사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열차가 도착했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하차하는 것을 저격할까, 아니면 마차에 타는 것을 저격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일단 상황이라도 보려고 나가 보니 이토가 기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과 함께 영사단(領事團) 쪽으로 병대가 정렬한 앞을 행진하고 있었다. (······) 나는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 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쪽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 나는 러시아 헌병들에 체포된 후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코레아 우라”라고 외치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각주1)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관련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러시아 검사 콘스탄티 미텔의 보고서에 “발사가 끝나자마자 철도경찰서장 대리인 기병대위 니키토로프가 범인에게 달려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강해 쓰러뜨릴 수 없었다. 격투 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범인의 발사 시간은 30~40초가 넘지 않았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검시결과서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는 세 발의 총탄을 맞았는데, 한 발은 어깨 부근을 관통했고 두 발은 폐를 꿰뚫었다. 그 결과 대출혈을 일으켰고, 10여 분 만에 절명했다.

작가 미상, 크기 및 소장처 미상
작가 미상, 크기 및 소장처 미상

일본 신문에 실렸었다는 위의 흑백 도판은 어느 신문에 실렸는지는 확인이 안 되지만, 당시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알려준다. 안중근 의사 뒤에 보이는 군인들이 바로 안 의사가 재판에서 언급한 ‘러시아 병대’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 앞에 있을 때 저격했다고 했으니, 이 그림을 통해 저격 전후 상황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안 의사는 거사 당일 오후 11시에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신병이 인도되었고, 그때부터 다음 해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당해 순국할 때까지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되었다.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저격당한 것을 사건 당일 알았다.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황태자(순종의 동생 영친왕)가 전보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주(뤼순)로 달려갔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은사금(恩賜金) 10만 원을 하사하라고 정부를 압박했고, 순종은 마지못해 재가했다.(대한제국의 금융자료에 의하면 1909년 당시 1원은 100전, 곧 10냥이었다. 따라서 10만 원은 동전으로는 100만 냥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당시 서울 시내에 있는 8칸 기와집 한 채가 1만 원이었으니 열 채 값이다. 지금의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30억 원 이상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신문은 인천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조선신문〉으로, 10월 27일자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10월 28일자 보도를 통해서다.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의 의거를 처음 보도한 10월 28일자에서, 신문사 편집국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에 대한 해명 기사도 함께 실었다. 며칠 뒤인 10월 31일자에는 용산에서 노동자가 암살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려서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황성신문〉도 현지에서 보내오는 전보를 받아 속보로 내보냈다.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28일자 1
  • 〈황성신문〉 1909년 10월 28일자 2
    • 1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28일자
    • 2〈황성신문〉 1909년 10월 28일자

‘응칠(應七)’이라는 자(字)로 알려져 있던 안 의사의 본명이 ‘중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거사 열흘 후인 11월 6일이었다. 〈황성신문〉은 ‘흉악한 행동을 한 자의 본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흉악한 행동을 한 안응칠의 본명은 안중근”이라고 밝혔다. 또 같은 날 기사에서, 3일 전 일본군 사령부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를 거행했다는 사실을 알려, 그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했다. 이튿날에는 안 의사를 뤼순으로 호송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안 의사의 나이와 용모를 소개했는데 실제 나이 29세가 아닌 ‘23세쯤’이라고 보도했다.

11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좀더 자세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가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것이 지사의 본분”이라는 말을 했고, 뤼순 감옥에서 취조 내용을 비밀로 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이 신문은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며 손가락을 끊어 결의를 다지는 ‘단지(斷指)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고종 황제가 폐위되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무장투쟁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이곳에서 안 의사는 300명의 의병 지원자와 함께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어 세 차례의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단지동맹’은 안중근 의사가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연해주 추카노프카 마을에서 1909년 2월 7일 동료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맹세하고,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씀으로써 결의를 다진 의식을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계속 이런 의병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나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인 것인데, 의병의 참모중장이 뤼순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로 다뤄달라는 논리였다.

11월 14일 재판이 시작되었다는 소식 이후 다음 해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 의사에 대한 보도는 계속되었다. 〈황성신문〉은 1909년 11월 14일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냈고, 이듬해 3월 25일자에서는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한이 없겠노라”는 내용의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언’을 기사로 출고했다. 유언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변호사 안병찬을 통해 공개됐다.

안 의사의 순국 소식은 사형이 집행되고 3일 후인 3월 29일에 알려졌다. 〈황성신문〉은 이날 기사에서,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10분 만에 절명하였으며 오후 1시 뤼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3월 30일자에는 안 의사의 동생이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는 뒷소식과 함께,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를 소개했다.

〈독립〉
〈독립〉

‘인심유위 도심유미’는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에 수록된 말로, 직역하면 ‘사람의 마음은 위태하고 도는 은미하다’인데, 주자(朱子)는 “사람의 마음은 육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마음이요, 도심은 본성에서 발로된 양심(良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 구절은 생략된 뒷부분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 允執厥中)’과 함께 송학(宋學) 이후 사람의 심성을 논하는 기본으로 인식되어왔다. “위태로운 사람 욕심(人欲, 人心)을 버리고 미묘한 천리(天理, 道心)를 붙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각주2)

〈황성신문〉은 이렇게 마지막 유묵(遺墨)을 보도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서명도 함께 소개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향한 당시 언론인들의 예의였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며칠 전 동생들에게 “독립 전에는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광복 후 남북한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무덤자리를 찾지 못해 유해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898년 주 2회 발행되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해 재창간한 일간 신문으로, 국한문을 혼용했다. 남궁억을 사장으로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이 편집에 참여했다. 늘 재정 부족에 시달렸고, 고종의 지원을 받았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정간당했다. 경술국치 후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제호를 바꿨다가 곧 폐간됐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고종 황제는 물론 애국지사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신문으로,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베셀(E. T. Bethell)과 양기탁이 1904년 창간해 국한문판과 영문판을 발행했다. 영국인 베셀이 발행인이 된 것은 일본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준열한 논설로 국민을 계몽하고 애국의식을 고취한 민족지였으나, 일본의 끊임없는 탄압으로 결국 베셀과 양기탁이 물러난 후 경술국치와 함께 〈매일신보〉로 바뀌면서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최서면, 〈안중근, 독립을 넘어 평화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09. 10. 26~2010. 1. 24 전시 도록 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