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up one dir, main page]

삼국의 사회와 문화

삼국의 사회와 문화

삼국은 모두 귀족 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어요. 또 각국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를 편찬하였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요.

종교 면에서는 불교가 널리 유행했는데, 불교는 호국적 성격을 띠었지요, 도교도 중요한 종교였는데, 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어요.

한편, 삼국은 다양한 고분과 고분 벽화를 남겼답니다.

※ 아래 관계도의 용어 클릭 시 해당 내용으로 이동됩니다.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마인드맵1
삼국의 사회회의신분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마인드맵2
삼국의 학문역사책 편찬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마인드맵3
종교불교(호국적 성격)도교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마인드맵4
삼국의 고분 양식고구려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말풍선1

1. 삼국의 사회

회의

고구려 : 제가 회의
고구려에는 제가 회의라는 귀족 회의가 있었어.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부족장이나 높은 벼슬을 ‘가(加)’라고 불렀는데, 제가 회의는 모든 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라는 뜻이야.

부족장들이 모여 나라의 일을 처리했던 회의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귀족 회의로 변화한 거지.

고구려의 수상인 대대로를 국왕이 임명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이 선출한 것만 보아도 귀족들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어.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01

백제 : 정사암 회의
백제의 귀족들이 정치와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던 커다란 바위가 정사암이야.

여기서 나온 의견들을 적어 바위 위에 놓고 갔다가 얼마 후에 펴보면 그중 하나에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 의견을 받아들였대.

아마 밤에 왕이 가장 믿는 신하 중 한 명이 가서 표시를 했겠지. 백제도 귀족의 의견을 무시할 만큼 왕의 힘이 세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어.

신라 : 화백 회의
화백 회의는 신라 귀족들의 회의 기구로, 귀족 세력의 대표자로서 상대등이 수상 역할을 했어.

이 회의에서는 여러 명의 귀족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했지.

화백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인 상대등은 귀족 세력과 왕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했어.

상대등
고구려에는 대대로 밑에 관리들이 있고, 백제에는 상좌평 밑에 관리들이 있었듯이 신라에는 상대등을 수상으로 해서 그 밑에 17등급의 관리들을 두고 있었어.

한마디로 상대등은 모든 관리들을 통합하는 최고의 관리야.

만장일치
화백 회의는 왕이 갑자기 죽거나 전쟁과 같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귀족들이 모이는 회의 기구였어.

이런 회의에서 귀족들이 모두 찬성하는 하나의 의견을 왕에게 제시하면 왕조차도 그 의견은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래서 화백 회의에서는 힘들지만 다수결보다는 만장일치 제도를 택했어. 또 다수결로 하면 의견이 무시된 소수의 귀족들끼리 연합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거야.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02

화백 회의와 왕권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였어. 즉 화백 회의의 기능이 강해지면 왕권은 약해졌고, 왕권이 강해지면 화백 회의의 기능은 약해졌지.

신분

신라의 골품제
신라의 골품제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부족장들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두어 중앙 귀족에 편입시키면서 생겨난 제도야.

세력이 큰 부족장과 작은 부족장을 같이 대접할 수 없기 때문에 등급을 정해야 했어.

골품제에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 신분과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여섯 등급의 ‘두품’이라는 신분이 있었어.

두품 아래에는 평민이 있었지. 두품은 6두품이 가장 높고, 숫자가 작아질수록 신분이 낮아져.

신라의 골품은 관직 진출뿐만 아니라 혼인, 집의 크기 등에도 엄격한 제약을 받았어.

신라의 골품과 관등표

신라의 골품과 관등표

성골
성골은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 해당할 정도로 귀한 신분이었어.

왕은 성골에서만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순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사촌간이라 할지라도 성골끼리 결혼을 했지.

진골
진골은 신라의 제2신분으로, 부모 중 한 쪽은 왕족이고 한 쪽은 귀족인 경우에 해당하지.

최고 관등까지 올라갈 수 있고, 중요 관직을 차지했어.

노비
남자 종[奴]과 여자 종[婢]을 합쳐서 노비라고 해. 노비들은 왕실, 귀족, 관청 등에 소속되어 지배를 받았어.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전쟁 포로가 많았지. 이들은 전쟁에 이긴 국가의 노비가 되었어.

또 죄를 짓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한 농민들도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

고리대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이 돈이 필요할 때 귀족들은 아주 높은 이자, 즉 고리대를 받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었어.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그 농민이 가지고 있던 땅을 빼앗거나 돈을 빌려간 농민을 노비로 만들었지. 이렇게 하면 귀족들의 재산만 늘어날 뿐이었어.

반면 나라는 세금을 내는 신분인 농민이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어.

진대법
고구려고국천왕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을파소를 신하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어.

을파소는 백성들이 어려울 때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때 갚도록 한 진대법을 처음 실시했어. 지금의 복지 정책인 셈이지.

04삼국의 사회와 문화_04

2. 삼국의 학문

역사책 편찬

고구려 『유기』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야. 고구려에 관한 신화, 전설, 왕족 이야기 등이 실려 있었다고 해.

『유기』는 양이 어마어마한 책이어서 영양왕 때 이를 간추려 만든 역사책이 『신집』이야. 둘 다 전해지지 않고 있어.

백제 『서기』
근초고왕 때 박사 중 한 명인 고흥이 『서기』라는 역사책을 만들었어. 이 책도 지금은 볼 수 없어

신라 『국사』
거칠부는 역사책을 만들라는 진흥왕의 명령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하였어. 이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어.

3. 종교

불교(호국적 성격)

나라를 보호하는 걸 호국이라고 해. 우리나라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야.

불교는 수행도 중시하지만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기도했거든.

불교에서는 살생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지만 큰 전쟁에서는 승려들이 무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싸웠지. 당연히 왕실에서는 불교를 좋아했어.

그래서 큰 사찰이나 탑을 많이 세웠어. 또 불교에서 우러러보는 부처가 곧 왕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어 불교는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어.


목탑 → 석탑
탑은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인도에서 만들어졌어.

탑 문화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 나무가 풍부한 중국은 탑을 나무로 큼지막하게 만들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을 만들었어.

그러다가 점차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화강암을 이용해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어.

미륵사지 석탑
절 이름 뒤에 ‘지’가 붙으면 현재 절은 없지만 과거에는 절이 있었던 땅을 말해. 그러니 미륵사지 하면 미륵사 절터가 되겠지.

그런 절터에 남아있는 돌로 된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야. 돌로 만든 탑 치고는 매우 웅장했어.

아마 목탑을 이런 모양새로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어. 원래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하나만 남아 있어.

일제 강점기 때 복원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가 2001년부터 본격적인 해체·보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분황사 석탑
신라에서도 목탑의 흔적을 알 수 있는 탑이 있어. 분황사에 있는 분황사 석탑이야.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차곡차곡 쌓아 제법 규모가 큰 목탑 형식의 석탑을 만들었어.

색깔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탑 주변의 조각상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워.

분황사 석탑은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이 남아있는 탑이야.

도교

도교는 중국에서 들어온 사상으로, 기본적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신선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 민족 고유의 사상과 불교 등이 합쳐져 만들어진 종교야.

속세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바랐지. 그림이나 조각 등 삼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어.

중국에서는 아직도 큰 종교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불교가 더 큰 역할을 해 왔어.

백제에서 도교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인 금동 대향로

백제에서 도교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인 금동 대향로

신선 사상
오래도록 죽지 않고 산다는 신선을 믿고, 자신도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 사상을 신선 사상이라고 해. 신선 사상은 귀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어.

각종 그림이나 고분 벽화, 조각 등에서도 신선 사상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거든.

전쟁이 잦았던 삼국 시대에는 시끄러운 현실 세계보다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이 매우 컸기 때문에 신선 사상이 유행했어.

사신도
사신도는 도교에서 말하는 동서남북을 다스리는 신을 그린 그림을 말해.

구체적으로는 동쪽에는 푸른색의 용인 청룡, 서쪽에는 하얀 호랑이인 백호, 남쪽에는 상상의 붉은 새인 주작, 북쪽에는 상상의 검은 동물인 현무를 그린 그림이야.

강서 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걸작으로,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

고분에 방위신인 사신을 그린 이유는 사신이 죽은 후의 세계를 지켜 준다고 믿었거든.

사신도 중 백호도

사신도 중 백호도

산수무늬 벽돌
도교에서는 자연의 세계를 몹시 중시해. 그러니 자연의 모습을 많이 남겼겠지? 대표적인 것이 백제산수무늬 벽돌이야.

여기에는 산봉우리, 산악, 흐르는 물 등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잘 담고 있어.

둥그스름한 산 모양이 우리 국토의 모양을 닮은 것 같고, 조화미나 여백의 미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야.

이런 모양의 벽돌을 특별히 제작해 사용했던 사람은 아마도 귀족이었을 거야.

산수무늬 벽돌

산수무늬 벽돌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는 봉황 한 마리가 연꽃 봉우리를 물고 날아가는 모양새인데,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도교 사상을 아주 잘 나타낸 것이야.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조화된 아름다운 향로지.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유적 중 하나인 우물에서 발견되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였어. 향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겹으로 싸여 있었지.

아마도 적의 침입이나 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이 향로가 적의 손에 넘어가거나 화재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우물 안으로 던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어.

4. 삼국의 고분 양식

아직까지 남아있는 옛날 무덤을 고분이라고 해.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와 공주, 가야가 있던 김해 지방 등에 가면 고분을 많이 볼 수 있지.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나오기도 해서 당시의 시대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어.

고분의 규모를 볼 때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고분을 만들 수 없었을 거야.

고구려

돌무지무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을 돌무지무덤이라고 해. 고구려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무덤 형태지.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로, 초기 문화를 보면 비슷한 점이 많은데, 무덤도 마찬가지야.

고구려의 장군총과 백제의 석촌동 무덤은 모두 돌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이야.

장군총

장군총

굴식 돌방무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게 되었어. 굴식 돌방무덤은 무덤 가운데 돌로 된 방을 만들고 무덤 입구까지 통로를 만들었어.

돌로 된 방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돌로 된 벽이 있겠지? 이곳에다 그림을 그려놓았어. 하지만 굴을 이용해 도둑이 들어가기 쉬워서 유물들은 남아있지 않아.

고분 벽화
옛날 무덤 형식 중 돌로 방을 만들어 시신을 놔 둔 경우에는 사방에 벽이 있어서 이곳에 그림을 그렸어.

이걸 고분 벽화라고 해. 고분 벽화는 고대 사회의 사진이라고 생각하면 돼.

특히 고구려는 신분,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 문화, 과학 기술, 사냥술 등을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벽화를 우리에게 남겨주었어.

고구려 벽화로 유명한 수렵도, 사신도 등도 모두 고분 벽화야. 심지어 다른 나라의 벽화에 남아있는 자료로 고구려나 백제의 의상 등을 연구하고 있기도 해.

각저총 씨름도

각저총 씨름도

벽돌무덤
백제의 무령왕릉은 이미 발굴된 무덤을 조사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는데, 정말 아름다운 무덤이야.

하나하나 무늬를 새긴 아름다운 벽돌로 시체를 누이는 방을 만들었지. 다행히 도굴도 전혀 되지 않아 백제의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어.

무령왕릉처럼 벽돌을 제작해 만든 무덤을 특별히 벽돌무덤이라고 불러.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양식이지.

무령왕릉

무령왕릉

돌무지 덧널무덤
수많은 문화재들이 나온 천마총, 금관총 등의 신라 무덤들이 모두 돌무지 덧널무덤이야.

시신을 넣은 널을 또 다른 큰 널에 넣고 그 위에 돌을 쌓은 후 흙을 덮어서 만들었어. 덧널 안에는 시신을 넣은 널과 많은 문화재들을 넣었지.

입구가 없이 흙, 돌을 많이 쌓아 올렸기 때문에 도굴을 막을 수 있어서 지금 우리가 수많은 문화재들을 볼 수 있는 거야.